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 범위 밖의 요인들이 작용해 성공한 것인가?
전 세계에 팽배해 있다고 하기도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능력주의'. 팽배해 '있기'보다는 '지배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이는 나 역시 능력주의라는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며, 내가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능력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어떤 이에게는 인생관이기도 하며, 누군가는 밥 먹듯이 입에 달고 사는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라는 말은 능력주의를 대표하는 슬로건이기도 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사실,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후 서술하겠지만, 난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의 폭정'을 비판하는 논리 구축 과정이 썩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른 수치를 이용한 샌델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세부적 수치를 이용하기 전의 대전제 구축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가령,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아 성공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샌델은 '성공하지 못한 A는 노력하지 못했다는 박탈감을 얻는다'라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 난 샌델의 이런 이분법적이며 과격하게 반대급부를 제시하는 것을 보며 본능적 거부감을 느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했을 수도 있고, 통제 범위 밖의 요인들이 작용해 성공한 것일 수도 있고, 통제 범위 밖의 요인들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급하게 나간 감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내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 그거면 된다. 현실적으로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살지 말아야지!'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슬로건은 일종의 마인드셋이며,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자아 구축에 가깝다.
물론, 재능의 우연성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B라는 사람의 대성공 위에는 B의 능력을 좋게 쳐 주는 사회가 있어서이다. 성공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결과적 개념에 있어서 온전히 그 사람만의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실패 또한 순전히 그 사람의 몫은 아니다.
재능의 우연성, 즉 '난 시대를 잘 타고난 운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마인드는 성공이 주는 오만을 경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슬로건이다. 내 삶을 성공이라고 말하긴 턱 없이 창피하지만, 내가 이뤄가는 성취들 앞에 나는 항상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말하고 다닌다. 난 진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혼자서는 내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없으니까.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 아래에서 난 살아갈 수 없다. 샌델이 말하는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안타깝지만 나는 배려할 수 없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스스로의 동기부여를 통한 진보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안타깝지만 밝은 내 미래에 어둠이 엄습해올 것만 같다.
샌델 씨, 저는 저의 일들이 결코 저 혼자만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제 퍼포먼스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저는 '제가 일을 잘하니까요'보다 '운이 좋아서 어떻게 잘 됐네요' 혹은 '누가 잘 도와주셨습니다'라고 대답한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전 앞으로도 그걸 거예요. 전 아마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스스로를 이끌어가고 있나봅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인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히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덕분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 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