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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이 Jul 02. 2024

사랑의 면면


직장 동료였던 승복과 인각은 승복의 퇴사 후 본격적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교제하는 6개월 동안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데이트를 했고, 먼 거리에서의 공중전화 수발신이 엇갈릴 때면 서로를 그리워하며 몇 통의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두 계절이 지났을 무렵, 26살의 인각은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별다른 말도 없이 24살의 승복에게 결혼반지를 건넸다.


이후 둘은 온 가족이 모인 추석 명절에 맞춰 양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승복의 엄마는 인각에게 ‘승복이는 어릴 적부터 추위를 하도 많이 타서 겨울에는 심부름도 안 시켰다’며 승복을 고생시키면 안 된다는 말을 건넸다. 한겨울에도 몸이 불처럼 뜨거웠던 인각은 어떤 결심을 했다. 인각은 이번에도 별말없이 승복도 모르게 신혼집 단칸방을 마련해 왔고, 어디선가 빨래 건조대와 수납장도 사놓고, 시청에 가 혼인 신고도 하고 왔다. 승복의 고향인 공주 시내에 하나뿐인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그렇게 둘은 겸연쩍은 살림을 시작했다.


엄마는 종종 아빠와의 연애 시절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며 자신이 몇 번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과 얼렁뚱땅 결혼을 한 것 같다며 장난스레 말했다. 55살이 된 엄마는 여전히 26살의 아빠가 어떤 이유로 자신과 결혼을 결심했는지 듣지 못했다. 당신 앞에 서면 왠지 온종일 자신감이 생긴다거나 혹은 당신과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실컷 바보가 될 수 있다는 말 따위의 문장을 말이다. 느닷없이 시작된 사랑과 어느새 들어찬 마음의 확신이 결혼의 이유였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나 또한 어렸을 적부터 과묵한 아빠의 생략된 말 속에서 침묵을 해석해 내곤 했다. 늘 이렇다 할 표현이 없는 아빠는 많은 말을 아끼고, 진심을 자신 밖으로 잘 꺼내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적어도 아빠와 긴 시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단둘이 약 3주간 유럽을 여행했다. 아빠는 한국과는 다른 풍경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고 생경한 모든 사물에 감탄했다. 그리고 근사한 배경을 두었을 땐, 한국과의 시차를 확인한 뒤 꼭 엄마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아빠는 전화를 받은 엄마에게 대뜸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물었고, 흔들리는 영상 화면이 잘 보일 리 없는 엄마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면 만족한 표정으로 그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 현지 가이드처럼 열심히 설명하곤 했다.


나는 두툼한 양손으로 스마트폰을 꼭 쥐고 엄마와 영상 통화를 하는 아빠의 모습을 정면에서 자주 바라봤다. 여행하는 동안 가장 환하게 웃는 얼굴을. 아빠는 엄마와 이렇게 오래 멀리 떨어진 적이 없었고, 나 또한 엄마와 멀리 떨어진 아빠의 모습을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아빠가 웃느라 입을 크게 벌리면 눈가의 주름이 저렇게 깊게 지는구나. 화면을 집중해 바라보는 눈빛은 저렇게 반짝이는구나. 발신과 수신이 엇갈리지 않았을 때는 이렇게 반가워하는구나. 잠시 관객이 되어 사랑에 빠진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소리 나는 언어로는 발화되지 않았던 사랑의 면면을.


한날은 숙소에서 저녁을 만들어 아빠와 식사를 했다. 맥주를 마시고 술기운이 오른 아빠는 내게 ‘네 엄마는 양초 같은 사람이야, 자신을 태우면서 주변을 밝게 비추는. 네 엄마는 나에게 늘 잘했어. 내 분에 넘치도록.’ 말했다. 아마 누구에게도 전한 적 없는 아빠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맥주를 다 마신 아빠는 알림음 때문에 엄마가 자다가 깰 수도 있으니 엄마에게 카톡을 보내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반만 덮은 채 잠에 들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는 종종 잠자리에 누워 발이 시리면 그 발끝을 열이 많은 아빠의 종아리 밑으로 쏙 넣어 주무시곤 했다. 어쩌면 그게 아빠의 사랑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많은 말을 생략하면서도 어떤 말을 건넸을 것이다. 자신의 몸 일부를 내주며 체온을 맞추고, 멋진 풍경 앞에 설 때면 그 장면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주변을 밝히기 위해 힘껏 태운 불빛보다 꺼진 뒤의 그을음을 바라봐주고, 얼렁뚱땅 결혼한 것 같다며 푸념하는 엄마 옆에서 그저 말없이 허허 웃으며 사랑을 표현했을 테다. 소란스럽지 않게. 그 사랑이 소란하지 않아 나는 너무 먼 곳에 와서야 그것을 깨달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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