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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육 Jun 06. 2023

서울 여행 - 1

첫 날부터 너무나 즐거워버린

 서울에 짧지 않은 기간 살았던 입장으로서는 있는 그대로일 뿐인 서울여행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자조 섞인 듯 들린다. 서울에 살아야 하는데 어쩌다 서울로 여행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나 그런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옅게나마 갖고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서울을 동경하는 병을 많이 극복해낸 것은 지방에서의 안락한 삶에 꽤 익숙해진 덕분이 클 것이다. 볕이 잘 드는 널찍한 집이 보장된 지방의 삶을 살아가다가 서울의 호스텔이며 싼 숙박업소를 이용하면 격차가 풍기는 불편함을 강하게 느낀다. 차를 끌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편한 삶은 서울에 살며 쌓은 대중교통 속에 낑겨서도 평온할 수 있었던 내성을 많이 앗아갔다. 친한 친구가 이제는 서울에 있었던 숫자만큼 지방에도 생겼다. 굳이 서울에 안 가도 괜찮은 상황, 오히려 짐을 챙기며,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갈 생각을 하면 조금은 막막함이 밀려오는 그런 상황이 됐다.

 마냥 서울을 동경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의 지하철 역들을 헤아려보면 알 수 없는 설렘이 느껴진다. 신사, 광화문, 홍대입구, 삼성, 건대입구, 군자, 노원, 종로3가. 왜 서울에 있을 때는 집에만 있었던 걸까 후회가 되다가도, 그땐 돈이 없었으니 집 밖에 나가는 게 어려웠겠구나, 생각한다.

 광주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 가량이 지났고, 수서역에 도착했다. 잠을 자든 음악을 듣든 딴짓을 하면 도착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멀기는 먼 거리다. 지난주까지는 서울에 간다는 사실이 그리 설레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조금씩 서울에 간다는 사실이 실감이 갔다. 그리고 수서역에 도착하니, 설렘으로 가득찼다. 휴가가 시작되었음을, 서울에서 맘껏 놀 수 있음을 서울에 발을 딛고 나서야 마침내 완전히 깨달았다.

취준생 시절에는 코인락커 이용료가 아까워서 짐을 낑낑대고 다녔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금액 대비 제공하는 편의가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에서인지 여유가 생겨서인지 짐을 바로 코인라커에 집어넣었다. 예전에는 라커 한 부분에 작은 스크린이 있어서 짐을 맡기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플을 설치해야지만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더는 바뀔 여지가 없다 생각한 것마저 바뀌는 게 신기했다.

 첫 날 점심을 신사역에서 먹기로 한 것은 힙한 동네 중 수서역에서 한번에 갈 수 있는 근처 동네이기도 하고, 숙소를 서울 서쪽에 잡았기 때문에 남은 기간동안 서울 서쪽은 편하게 갈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서쪽에 덜 치우친 동네를 가야겠다 생각하며 정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 내려 첫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가로수길 외곽의 수제버거집에 갔다. 서울의 가게답게 외관이 힙했고 음식은 외관만큼이나 맛있었다. 패티 추가를 해서 먹는게 대세인 가게라는 후기가 많았는데, 패티 추가를 안 한 햄버거로도 충분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사람들이 소화를 잘 하는건지 내 소화능력이 떨어지는건지 의문이었다.

 밥을 먹고 에이랜드가 보여 들어갔다. 입고 온 무신사 퍼티그팬츠가 이 더위와는 맞지 않아 얇은 바지를 사야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그런 옷가게에 가면 걸려있는 옷 몇 벌을 꼬집어보고 가게를 나설 뿐이다. 스파브랜드에 가거나 온라인을 통해 옷을 사는게 버릇이 돼버린 탓이다. 결국 아무 옷도 고르지 못하고 더운 길거리로 나섰다.

 길을 걷다가 눈길을 끄는 카페가 있어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가로수길 물가가 반영된 탓인지 아메리카노가 6500원이었다. 공간이 널찍하고 음악도 빵빵하게 틀어줘서 - 이어폰을 꽂고 있을거라면 올 이유가 없는 - 나쁘지는 않았다. 커피 값에는 시간과 공간 값도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비싸도 납득할 수 있었다. 다만 노트북과 공부 금지, 그리고 매장 이용하지 않고 화장실 도둑을 할 경우 벌금을 부과한다는 날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하게 지방 사람 입장에만 서서 각박하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의아한 문구가 적혀있는 이유는 그 문구를 적게 한 이유가 분명 있기 때문일테니까. 그래도 난데없이 서울에 놀러와 마주하기에는 조금 각박해보이는 문구임은 어쩔 수 없었다. 노트북 금지 문구 근처에 조그맣게 저녁이나 주말 한정이라는 단서조항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괜히 신경이 쓰여서 핸드폰으로 간략하게 여행기를 타이핑했다.

여름 바지를 재도전하러 H&M에 갔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남성 매장을 찾을 수 없었다. 여성 전문 매장인가 생각하며 그냥 가게 밖으로 나왔다. 점원에게 한 번 물어봤어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살아가게 생긴 것이다. 다시 거리로 나와 돌아다니다 오랫동안 가지 않던 에잇세컨즈 매장이 보였다. 무거운 바지가 너무 더워 혹시나 하고 매장으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인생 바지를 만났다. 딱 사고 싶었던 그런 스타일의 밝은 색 여름 바지를 건졌다. 편견을 가지고 살 이유가 없구나 하는 소소한 생각도 덤으로 건졌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내려 바로 역 근처의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는, 예약한 숙소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로비에 노숙자가 자고 있었지만 숙소 환불기간은 애진작 지나버렸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서는 수밖에는 없었다. 전적으로 가격만 보고 고른 숙소. 호스텔 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아이패드를 올려둘 정도의 군더더기가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괜찮은 방이라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는...

 친구를 만나기로 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내렸다. DDP 바로 옆에 중앙아시아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서울에 7여년을 살아왔지만 알지 못했다. 한 골목을 접어 들어가니 갑자기 외국어와 외국인이 가득한 동네에 뚝 떨어졌다. 구경차 들어간 마트는 정말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 어디쯤 있을법 한 분위기였다. 무언가를 살 생각이 없었지만 여기 왔으면 보드카 한 병쯤은 기념품으로 사가라는 친구의 말에 13000원짜리 보드카를 집어들었다. 친구는 신이 나서 구경하더니 대추야자며 홍차며 하는 물건들을 샀다. 이게 이렇게 싸다니 정말 즐겁다는 말과 함께. 아는 만큼 세상에 즐거운 꺼리가 많아지는 것 같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꽤 즐겁다는 생각도 했다.

 중앙아시아거리의 진수는 거리에 서있을 때가 아닌 가게에 들어갔을 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위에서 방문한 마트에서도, 그 뒤에 들어간 식당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외국 요리 전문 식당의 여느 인테리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우즈베키스탄 그 자체인 실내가 펼쳐져 있었다.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종업원과 손짓 발짓을 하며 빨간 스프와 그 유명한 샤슬릭을 시켰다. 스프는 적당히 맛이 있었다. 그리고 양고기 샤슬릭은 한 입을 베어물으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맛있는게 참 많다 생각했다. 술 한 병짜리 안주인데 술을 시킬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두번째로 들어간 가게 역시 술을 팔지 않는 곳이었는데,  대신 술을 들고오면 안주를 조금 많이 시키는 조건 하에 마셔도 되는 곳이었다. 이미 샤슬릭 16000원어치를 먹은 우리는 추가로 샤슬릭 32000원어치를 주문했다. 양고기는 5만원어치를 먹어도 매 입이 맛있었고, 그냥 기념품으로 가볍게 산 싸구려 보드카는 소주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디저트 역시 독특하니까 꼭 먹어보자는 친구의 제안에 3차로 다른 가게에 들어섰다. 나폴레옹이라는 바삭바삭한 여러 겹의 케익에 홍차와 커피를 마시며 마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도저히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가게 할머니가 접시를 치우셔서 시계를 보니 시간이 열 시가 넘어있었다. 군대에서 만났으니 벌써 10년차에 접어든 친구다. 오랜 시간 큰 탈 없이 친구라는 것은 아무래도 잘 맞는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죽이 잘 맞는 친구를 일년에 한 번 꼴로 봐야한다니 슬프기도 했다. 여행의 첫 번째 밤부터 이렇게 즐거워도 괜찮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하루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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