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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Nov 01. 2021

12. 독립운동의 전개 2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성장 

|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성장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 – 민중의 각성을 촉진시키다!!


3·1 운동 이후 (민족) 부르주아층은, 일제에 대해 비타협적 성격이 강한 민족주의 좌파, 그리고 경제적 실력양성 운동을 중시하면서 개량주의 노선을 걸은 민족주의 우파(개량 주의자)로 나누어져 갔다. 그러나 1920년대 전반기의 경우 둘은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다. 이 둘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함께 참여했으나, 물산장려운동에도 부르주아 상층은 주로 초기에 참여하는 등 둘은 얼마간 차별성을 보였다. 

  3·1 운동 이후 결사의 자유가 일정하게 허용됨에 따라 청년단체가 급속히 조직되었고, 1920년경부터 노동자와 농민 단체가 각지에 조직되었다. 사회운동, 신지식 운동을 이끌었던 청년단체와 노동자 농민 단체는 1922년을 전후하여 분화(分化)되기 시작하여 개량주의들이 배척당하고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가들이 점차 주도권을 잡았다. 사회주의는 특히 학생·청년 등 젊은 층에게 참신한 자극을 주었다. 사회운동이 치열해지자 조선 총독부는 민족분열 정책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부추겼다. 1923년부터 나돌던 자치 운동론은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논란을 빚었던 이광수의 사설이 <동아일보>에 실리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1924년 4월 창립대회를 연 조선노동총동맹(조선 노동자 농민 총동맹)은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국적 노동단체였다. 같은 시기에 조선 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두 전국 단체가 만들어진 지 1년이 된 1925년 4월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일제통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첫 번째 목표로 내세웠다. 


표 1│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참고 8│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민족의 개조라 함은 민족성 개조라는 뜻이외다. 한 민족의 생활은 무수한 부문으로 된 것이니, ……이 모든 생활의 양식과 내용은 그 민족성의 여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요,……앵글로색슨족의 자유를 좋아하고 실제적이요 진취적이요 사회적인 국민성, 독일인의 이지적이요 사색적이요 조직적인 국민성, 라틴족의 평등을 좋아하고 감정적인 민족성, 중국인의 이기적이요 개인주의적 민족성……머리를 돌려 조선민족이 이처럼 쇠퇴한 원인을 찾아봅시다. 인국(隣國: 이웃나라)의 치자계급(통치계급)이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여 대경장(大更張:제도를 크게 고쳐 새롭게 함)을 행할 때 그 인국의 권유와 원조가 있음을 불구하고, 때맞추어 유신(維新: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의 원도(原圖:본그림:여기서는 배워야 할 본바탕을 의미함)를 행하지 못하여 전 민족으로 하여금 철천의 한을 품게 한 것은 그네의 죄 중에도 가장 큰 죄라 할 것 이외다.  하지만은 한 걸은 더 내켜 생각하면 이 역시 민족의 소사(所使:해야 할 일) 외다. 만일 영인(英人:영국인) 같은 자유를 좋아하는 정신이 있고, 불인(佛人:프랑스인) 같은 평등을 좋아하는 정신이 있다 하면 결코 신임치 못할 치자 계급을 그냥 두지 아니하였을 것 이외다. 또 치자 계급인 그네에게도 자유․평등․사회성․진취성이 있었다 하면 결코 조선민족을 이렇게 못되게 만들지는 아니하였을 것 이외다.  치자이든 양반이나 피치자(통치받는 사람)이든 일반 민중이나 그가 가진 추락한 민족의 희생이 되기에는 마찬가지 조선민족 이외다. 만일 다시 민족성을 추락하게 한 책임이 치자 계급에 있다 하여 그네를 책망할진대 그러한 치자 계급을 산출하고 존속케 한 책임이 또한 일반 민중에게 있다 하여 또 그네를 책망하게 될 것 이외다. 그러므로 치자 계급이든 양반에게 민족을 쇠퇴케 한 직접의 책임을 지우더라도 별 수 없는 일이요, 요컨대 조선민족 쇠퇴의 근본 원인은 타락된 민족성에 있다 할 것 이외다.

 영미족(영국과 미국의 인종)의 흥왕(興旺:번창하고 세력이 매우 왕성하다)도 그 민족성의 원인이요, 우리 민족의 쇠퇴도 그 민족성의 원인이니, 민족의 성쇠 흥망이 실로 그 민족성에 달린 것 이외다. 그러므로 일민족을 개조함에는 그 민족성의 근저인 도덕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함 이외다. 새 술은 낡은 부대에 담지 못한다. 부대는 터지고 술은 쏟아지리라. 낡은 재목으로 새 집을 짓지 못한다. 더구나 썩어서 무너진 집 재목으로 새 집을 지으랴. 짓지도 못하려니와 지어도 다시 무너지리라. 쇠퇴하던 백성이 그냥 흥왕하는 백성이 되지 못하리니 흥왕하려면 그 백성부터 새롭게 힘있게 하여야 할 것 이외다.  만일 그 썩어진 성격을 그냥 두면 아무러한 노력을 하더라도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니 민족적 성격의 개조! 이것이 우리가 살아날 유일한 길이 외다. 

                                                                                                                      『이광수 전집



참고 9│ 물산장려운동


물산장려운동의 사상적 도화수가 된 것이 누구인가? 저들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계급적 의식으로 보나 결국 중산 계급임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적어도 중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대변인인 지식 계급 아닌가. 또 솔선하여 물산 장려의 실행적 선봉이 된 것도 중산계급이 아닌가.

  실상을 말한다면 노동자에게는 이제 새삼스럽게 물산 장려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네는 벌써 오랜 옛날부터 훌륭한 물산 장려 계급이다. 그네는 자본가 중산 계급이 양복이나 비단옷을 입는 대신 무명과 베옷을 입었고, 저들 자본가가 위스키나 브랜디나 정종을 마시는 대신 소주나 막걸리를 먹지 않았는가? 

  실상 저들 자본가, 중산계급의 외래의 자본주의적 침략에 위협을 당하고 착취되고 있는 경제적 정복 관계의 엄연한 사실이 저들로 하여금 어쩔 수없이 ‘민족적’이라는 미사여구로서 동족 안에 있는 착취, 피착취의 상반하는 양극단의 계급적 의식을 은폐해 버리고, 일면으로는 ‘애국적’이라는 의미에서 외화 배척을 말하는 것이며, 그 이면에서는 외래의 경제적 정복 계급을 축출하여 신착취 계급으로서의 자기가 그에 대신하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저들은 민족적 애국적하는 감상적 미사로서 눈물을 흘리며 저들과 이해가 전연 상반한 노동 계급의 후원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으로 자각한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저들도 외래 자본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을 알며 따라서 저들의 전략에 빠져 계급 전선을 몽롱케는 못할 것이다.

                                                                                                    <동아일보. 1923. 3. 20>



참고 10│ 민립대학 설립운동


민립 대학 발기 취지서

  우리들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사업들이 모두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불능하도다. 왜냐하면 알고야 움직일 것이요, 알고야 일할 것이며, 안 이후에야 정치나 외교도 가히 발달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조선인도 세계의 일우(一隅: 한쪽 구석)에서 문화민족의 일원으로 다른 나라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우리들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빼고는 다시 다른 길이 없도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대한 비판

  동아일보는 이 운동이 실패하게 된 원인이 ‘우리는 심히 담백한 듯하면서도 심히 인색한 인민이다. 아마도 극도의 빈궁이 우리를 그러한 악덕에 빠지게 한 것이려니와 우리는 금전욕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식욕을 충족할 성의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당시 식민지 수탈 체제에서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 노동자, 농민 등 식민지 민중은 금전욕은 차치하고라도 지식욕을 가질 만한 어떠한 여유조차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 문맹 퇴치를 위한 최하급 교육조차 난망한 처지에 있었고, 최고 학부인 대학 교육이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식민지 하의 참혹한 사회 경제적 상태에서 최소한 해외 유학이나 최고 학부 또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제한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대중이 과연 그러한 부류의 자녀나 할 수 있는 교육을 받기 위해 모금에 참여하겠는가. 결국 이 운동은 모금 방법이 그러하듯 유지 즉 자산 계급을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참고 11│ 사회주의의 확산


 사회주의를 믿고 안 믿는 것도 딴 문제요, 사회주의가 실현되고 안 되는 것도 딴 문제이다. 다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는 알아야만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형편이다. 

                                                 <당시 발간된 혜성이라는 잡지에서 사회주의 서적을 광고하면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정복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 현대 자본주의 경제 조직에서 생겨난 자연의 현상… 강도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인은 전체적으로 몰락하여 무산자 화할 수밖에 없었고 일제 통치 테두리 내에서의 조선 민족의 발전은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민족해방운동은 일본 유산자에 대한 몰락하는 무산 조선 민중의 투쟁일 수밖에 없는 일…



<참고 13> 자치론의 한계


물산 장려운동이나 민립대학 설립운동 같은 실력양성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조선인 대지주, 자본가, 일부 지식인들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이들은 당장 독립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보고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자치론자들은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정치권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일부 식민지 통치자들은 자치제 실시 여부와 관계없이 조선인들 사이에서 자치 운동이 일어난다면 결과적으로 민족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운동을 방조하였다. (자치 운동을 은근히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록 ‘실력 양성 우선론’, ‘단계적 운동론’의 이름으로 합리화했지만, 자치 운동은 명백히 독립운동으로부터 일보 후퇴한 타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더구나 일제는 조선 민족에게 자치권을 허용할 의지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자치 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 운동이 분열되었다.


자치론의 말로 전시하 사상 통일의 구체적 방침 및 군수 자재 헌납 운동을 결의한 ‘조선 임전 보국단 전선 대회’에서의 발언록


• 김동환 : 적이 항복하는 날까지 우리의 적 장개석 정권을 비롯하여 영․미를 지구 상에서 격멸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배급 쌀까지도 편히 먹을 수 없는 형편이다.

• 이광수 : 사상에서 영미(米英) 격멸, 나는 천황 폐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늘 잊지 말고 이 성업 완수에 매진할진대 자자손손의 영화를 얻을 것이다.

• 주요한 : 루즈벨트여 답하라. 미함과 영함을 격침한 것은 화약의 힘만이 아니다. 멸신 보국의 황국 정신이요, 忠勇한 황군의 육탄의 힘이다. 1억 동포… 더욱이 반도의 2천4백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성전의 용사 되기를 맹세하고 있다.         

                                                                                                                    <실록 친일파>





1. <표 1>을 참고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와 농민운동에 힘썼던 원인을 설명해보아라.       


    

2. 이광수는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된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3. 물산장려운동은 국산품 애용운동이다. 이 운동의 한계점이 무엇인가?(참고 9)         


      

3-1. 3과 관련하여 ‘민족자본’ 혹은 ‘민족자본가’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아라                     



4.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부당한 일본의 교육정책에 맞서 우리의 자본으로 우리의 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한계점은 무엇인가?(참고 10)               



5. <참고 11>과 <참고 12>를 바탕으로 노동자와 농민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된 원인은 설명해보아라           



6. <참고 13>을 바탕으로 일제가 본문의 ㉡과 같은 정책을 실시한 이유를 설명해 보아라. 






|무장독립운동 

총칼로 일제에 맞서다!!


3·1 운동 이후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 전개가 급선무임을 자각하고 본격적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청산리 · 봉오동 전투와 같은 승리로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많은 독립부대가 해산되기도 하였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독립군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져, 조선 독립군들은 중국의 독립부대 세력과 연계하여 일제에 공동을 맞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 투쟁은 사회주의자들의 유격투쟁이 돋보였다. 

 이들은 수확기와 춘궁기에 친일 지주들로부터 쌀을 빼앗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중국지주와 군벌을 상대로 소작료 인하, 생존권 자치권 확보 투쟁 전개하기도 하였다. 


참고 14│ 보천보 전투 


당시 신문 호외 기사.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 호외

1937년 6월 동북 항일 연군 대원들이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보천보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국내 조직의 도움을 받아 경찰 주재소를 공격하고, 면사무소와 소방서 등 일제의 행정 관청을 불태우고 철수하였다. 돌아가던 중 추격해 오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보천보 전투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이 사건에 놀란 일제는 조국 광복회의 국내 조직 색출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한편, 만주지역의 유격대에 대한 공세를 크게 강화하였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김일성이 주도한 주요 항일 전적으로 기록하고 현장에 기념물을 조성하는 등 크게 선전해 왔다. 그러나 국내외 학계에서는 보천보 전투에 대한 북한의 역사 기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비판과 논란이 있어 왔다.




참고 15│ 미쓰야 협정


1. 만주에 있는 한국인에 대하여 증서를 발급하고 달마다 호구 조사를 하여 한인들을 철저히 감시한다.

2. 한국인이 무기를 갖는 것과 한국으로 침입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며, 이를 어긴 사람은 검거하여 일본 경찰에 넘긴다.

3. 만주에 있는 한인 단체를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하며, 무기와 탄약을 몰수한다.

4. 일본이 지명하는 독립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5. 그 대가로 일본은 국경을 넘어 중국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미쓰야 협정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가 동삼성 정권의 장작림과 체결한 협약     


독립군을 잡아라!

  만주 관료들이 독립군 체포에 전력하게 되니 독립군은 물론이고 일반 농민들까지 안심하고 살 수가 없었다. 수 없는 혁명 투사가 만주 관료에게 붙들려서 봉천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다음 국내로 압송되어 교수대의 이슬로 된 사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우며, 물욕에 눈이 어둔 만주 관료들 중에는 때때로 죄 없는 백의민족 농민을 잡아다가 작두로 목을 잘라 가지고 독립군을 잡아왔다고 보상금을 받는 참극도 있었다. 예를 들면, 1925년 10월 경 집안현 대양차구에 거주하는 이경전을 체포하여 목을 자르고 상금으로 3십 원을 받았다. 

이강훈 <무장독립운동사





1. 미쓰야 협정이 독립운동 세력 약화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설명해 보아라    




       

2.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가짜설이 퍼진 까닭을 설명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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