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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Oct 15. 2021

11. 독립운동의 전개 1

국외 독립운동이 더 활발했던 이유는?

| 독립운동과 새나라 구상

 일본의 침략에 맞선 조선인들!!


 독립운동을 타국 영토에서 한다는 것은 국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한 것을 제외한다면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도나 동남아처럼 독립운동은 대개 주민들이 사는 국내에서 하기 마련이다. 베트남은 중국 등 국외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지만, 일시적이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혹한 통치하에서 독립운동은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었을 뿐이고, 이 때문에 독립운동과 연관된 정치활동이 국내에서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일제의 지배정책으로 인해서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 특히 무장투쟁은 주로 국외에서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지역이 아니고 국가와 사회체제를 달리하는 여러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 러시아, 일본, 아메리카 대륙 등지에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와 사회체제를 달리하는 여러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세력들은 상호 연락을 취하기도 했지만, 독자적으로 활동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이처럼 일제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외에서 많이 전개되었고, 국내와는 부분적·일시적으로 연결되었으며, 국외의 민족해방운동 단체 간에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 민족해방운동에서 보기 어려운 한국 독립운동의 특징으로, 해방 후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한 기본적인 한 요인이 되었다. 

 독립운동은 크게 네 가지 방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3.1 운동 이전의 국외 독립기지 건설운동, 둘째는 3.1 운동, 셋째는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에 따른 사회주의자의 운동,  마지막으로 해외 무장 투쟁운동이다.      


국외 독립기지 건설운동

가혹한 일본 통치 - 국외에서 활동하다!!

 

만주 연해주의 독립운동 기지

1910년대의 국외 독립운동으로는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크게 호응을 받았다. 이 운동은 독립운동 및 독립군의 기본 역량 또는 토대를 조성하고 배양하기 위한 기지나 기반을 건설, 구축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의 추진 세력은 즉각적인 무력행동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중일 전쟁, 러일전쟁, 미일 전쟁같이 유리한 기회가 오면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이고자 했다. 이처럼 직접적인 무력 양성을 목표로 했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은 ㉠1908년 미주와 연해주국내 등에서 제기되어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 전후에 구체화되었다. 이상설과 이승희 등은 미주에서 보내온 자금 등으로 중·러 국경지대에 위치한 홍개호 부근 봉밀산 일대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민학교를 세웠다. 1924년 이동휘 등은 중국 동북만 왕청현 수분 대전자 라자구에 비밀 사관학교를 세웠다. 학생은 80년 이상 또는 100명 이상으로 알려졌는데, 간도 주재 일본 영상의 압력으로 1915년 말경 폐쇄되었다. 박용만 등은 미국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써 하와이에서 1914년 300명에 달하는 국민군단을 편성했고, 네브라스카 주에서 소년병 학교를 운영했다. 멕시코에는 승무학교가 있었다. 

 국외 망명자들이 독립운동과 직결시켜 벌인 중요한 사업이 교육이었다. 일제의 한 기록에는 1916년 12월 도문강 대안 지방에 163개교에 학생 4,904명, 압록강 대안 지방에 76개교에 학생 2,177명, 노령 및 미주 지방에 31개교에 학생 2,102명이 있다고 소개했다.

     망명자·이주민들이 교육을 중시한 것은 민족의식을 고취해 독립운동에 힘쓰게 하려는 점도 있었지만, 근대문화를 섭취하여 근대사회·근대국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식민지 교육과 자주적 교육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근대화와 자주적 근대화 문제와도 긴밀한 연관이 있다. 


참고 1│ 해외로 내몰리는 사람들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일본인이 한국에 들어오고 조선인들의 해외 이주도 크게 늘어났다. 자연재해와 전염병도 원인이었지만, 농토를 잃고 궁핍해져 살 길을 찾거나, 독립운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주민이 택한 지역은 처음에는 주로 역사적으로 조선과 밀접한 간도, 연해주 등지였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매년 약 1만 명이 간도로 이주했으며, 연해주 지역 조선인 이주민은 1897년에는 3만 명이었으나, 1911년에는 6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수렵, 어업, 상업 등에 종사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역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었으며, 조선인의 독립운동 기지로 이용되었다.

 미주 지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최초의 이민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으로,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7,000여 명이 이주하였다.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멕시코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였다. 미주 한인들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꿋꿋하게 생활하여 한인 사회를 형성하였고, 훗날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는 데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금성출판사



│참고 2│대한 광복회 강령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 아라사 등의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 회의 군사 행동, 집회 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尙德泰) 상회에 두고, 한만 각 요지와 북경, 상해 등지에 그 지점 또는 여관 등을 두고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친일 반역자를 수시 수처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함.



│참고 3│이상설의 활동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상설   

 

 1 9 1 0년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독립 운동가는 누구였을까?

 이상설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06년에는 이동녕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촌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항일 민족정신을 높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

 1 9 0 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여 전 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내에서는 궐석 재판이 진행되어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귀국을 단념한 이상설은 영국·미국을 거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유인석 등과 성명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한때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이상설은 이동녕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 등을 발행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다. 1914년에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취임하고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과 같이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기지 설립이 가능했던 이유를 <참고 1>을 바탕으로 설명해보아라 


         

2. <참고 2>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기지의 인적 구성은 어떻게 하였는가를 설명하여라.          



3. 이상설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참석하려고 했던 회의는 무엇이었는가? 






| 삼일 운동

조선 민중,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다!!


종로에서 시위 군중에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3·1 운동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였지만, 3·1 운동의 일어난 배경에는 국제적 정세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는 세계의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 행방을 지원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 이후 1차 대전 종전 처리 과정을 위한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조선에서는 독립 청원 여론이 일어나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자극을 받은 동경의 유학생을 중심으로 1919년 2·8 독립선언이 일어나고, 국내에서는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3·1 운동은 단순히 민족 대표 33인이 일으킨 운동이 아니라 일본 지배에 대한 조선 민중의 총체적 저항이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집회 또는 시위는 전국 211개 부(部)·군(郡), 그리고 서북간도와 사할린 등지에서 1,542회 일어났다. 국내의 경우 평안남북도가 34개 지역에서 315회,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가 25개 지역에서 297회 일어나 가장 횟수가 많고, 인구는 적고 산간지대가 많은 강원도가 13개 지역에서 57회 일어나 가장 적지만,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일어났다. 또한 참여층도 다양했는데 한 자료에는 3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3·1 운동으로 인한 전체 교도소 수감자 8,767명 가운데 교사 277명(3.15%), 학생 972명(11.06%), 종교인 279명(3.18%), 농업·입업·어업 5,209명(59.28%), 광업 10명(0.11%), 공업 276명(3.14%), 상업 823(9.37%), 노동자 326명(3.71%), 무직 302명(3.44%)으로 나와 있다. 

     3·1 운동은 개인의 각성을 촉진시켰고, 3·1 운동 이후부터 소작쟁의와 노동쟁의,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이 의미하듯 농민과 노동자의 각성을 촉진시켰다. 또한 이 시기에 여성 자신에 의한 여성운동도 나타났으며, 약간 늦지만 차별받던 백정들의 해방운동인 형평운동도 일어났다. 

 3·1 운동은 일제의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 4│ 왜 하필 3월 1?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 행렬

고종의 인산(국장) 일은 3월 3일이었다. 국장에는 전국에서 참례하는 군중이 서울로 몰려들 것이었다.(대략 20만) 민족대표들은 그 많은 인원의 이동을 염두에 두고 독립운동의 거사일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장 당일에 봉기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다. 또 국장일에 폭동이 발생하면 독립운동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고, 국장일 이후인 3월 4일도 제외하였다. 그런데 3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봉기한다는 것에 찬성할 리가 없었다. 3월 1일이 거사일이 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사비평, 1992. >   

 



|참고 5| 누가 그들을 민족 대표라 이름 붙였던가?


1.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 기독교인 16, 천도교도 15, 불교도 2명, 대표 - 손병희

2. 독립 선언에 참석한 사람 : 29인(4명은 어디로?)   

3. 변절자들 : 최린, 정춘수, 박희도 등


  요릿집 태화관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적 장소로 유명하다. 태화관은 명월관의 별관이었다.......  명월관은 차츰 조정 대감들의 놀이터에서 친일파들이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거들먹거리면서 방탕하게 노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대표적인 친일파이자 합방 주역이었던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 등이 단골손님으로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명월관은 1918년에 불타 버렸다. 주인 안순환은 새로운 장소를 찾다가 순화궁에 명월관 별관으로 태화관을 열었다. 태화관은 다시 장안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이 모여들면서 손님들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태화관에는 양악대가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손님들은 양악대의 빠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기생들과 춤을 추었다.

  태화관이 독립 선언 장소로 쓰이게 된 데에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힘이 컸다. 대화관에 자주 드나들었던 손병희는 태화관 기생 주옥경과 사귀고 있었다. 3월 1일 아침, 손병희는 태화관 주인에게 전화를 걸     

어 점심 손님 30명이 간다는 연락을 하였다. 오후 1시 무렵부터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였고, 동쪽 처마에는 태극기도 걸렸다. 이들이 모인 자리는 태화관 사교 1호실이었다.

  이윽고 민족대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극기를 향해 경례한 다음, 최남선이 지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려 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는 이미 다 보았는데 굳이 낭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선언서는 낭독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 기념 잔치를 벌였다. 이어 손병희는 주인 안순환을 불러 일제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얼마 지나 일제 헌병과 순사들이 인력거를 가지고 태화관으로 오자, 민족대표들은 자동차를 가져오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다시 택시 일곱 대가 오자, 민족대표들은 서로 나누어 타고 필동에 있던 경무총감부로 순순히 잡혀갔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장소를 학생,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던 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갑자기 옮겼다. 그것은 3·1 운동이 더욱 확대되고 폭력화되어 일제와 충돌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친절하게도 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알리고, 체포해 갈 것을 부탁하였다. 이들이 일제에 타협하고 항복한 것은 민중들이 적극 나서서 싸운 모습과 견줄 때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33인의 나약한 모습은 학생을 비롯한 민중들이 선언서, 유인물,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고 시위 대열을 이끌어 갔던 모습과 대비된다. 33인이 내세운 비폭력 주장은 200만 명이 참여하여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몇만 명이 다치고, 몇천 명이 목숨을 잃은 현실에 비춰 볼 대,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이었다. 33인의 대부분이 2·3년 징역을 산 데 비해, 민중들은 7500명이 죽고, 15년 넘게 감옥 생활을 한 사람도 숱하게 많았다.       



참고 6│ 여성들의 독립운동


대한 독립 여자 선언서.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만주에 있던 여성들도 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여성이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일편단심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만 바랐을 뿐이다.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아직 미성년인 여학생들이외다. 우리는 처음 독립 선언할 때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분개히 여기고 3월 1일 저녁에 학교에서 몇 사람이 퇴학하고 나오니 참으로 앞길이 망연하여 갈 바를 알지 못했나이다. 이 같은 가련한 형편 중에서도 다만 일편단심은 우리도 한번 사람의 구실을 다하여 남들이 하는 일을 함께 하여보자는 생각으로 밥 먹을 것도 잊고 분발하여 경성 안 모든 여학교에 연락하여 동맹 휴학하기로 하고 청원서를 학교에 드리었나이다. 그 후 3월 5일 오전 9시에 경성 각 남녀 학교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을 때에 위치는 남대문 밖에서 시작하였고 우리도 이 곳을 찾아갔나이다. 걸음도 잘 걷지 못하는 여학생들은 길을 몰라 방황하다가 길에서 잡힌 자 반이나 넘었나이다. 

   아 여러분, 우리가 이 때 왜 이 같은 용기가 있었으리까. 아니올시다. 다만 이 목적 아래서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리 한 연고올시다. 아무리 용기를 발한들 근본적으로 연약한 여학생들이야 어찌 남자의 힘을 당하오리까. 얼마 못가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은 모두 여학생들이었습니다.     

                                                       <3.1 운 때 투옥당했던 어느 여학생이 한인 신보에 보낸 글>



참고 7│ 독립운동 양상의 변화 


시위를 목격한 외국인들이 한 말에 따르면 이번 시위는 이제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특이하였다고 한다. 새롭게 눈뜬 자유로 맥박이 고동치는 이 거대한 백의의 군중은, 그들에게 아무런 명분도 없이 고문과 약탈을 자행해 온 바로 그 일본인들에 의해 사방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일본인들의 과오에 대해 보복할 기회가 드디어 이른 지금에 와서도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자기 조국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수는 한국인에 대비하여 17/1000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만약 한국의 시위대가 무저항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어떠한 사태가 발생했을까 하는 점을 짐작할 수가 있다.  

                                                                                                      C. W. 켄달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그 가운데 심한 것은 미리 낫, 괭이, 몽둥이 등 흉기를 가지고 전투적인 준비를 갖추었다. 군중이 나가고 물러남은 오로지 지휘자의 명령에 따랐다. 미리 훈련받은 정규병과 같은 모습을 띠었다. 이들은 집합하자마자 우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 기세를 올렸다. 나아가 면사무소, 군청 등 비교적 저항력이 빈약한 데를 습격함으로써 군중의 사기를 높이고 마침내는 경찰 관서를 습격하여 때때로 파괴적 행동에 빠지려 하였다.  

                                                                                                            <일본 헌병대 보고서>     





1. 3.·1 운동에 영향을 준 요소들을 모두 정리해보아라            


         

2. <참고 4>를 바탕으로 3.1 운동이 3월 1일에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해 보아라.    


           

3. 그림 <3.1 운동 당시 직업별 투옥자의 분포도>를 참고로 3.1 운동이 민족대표 33인의 운동이 아님을 설명

하고 3.1 운동의 성격에 대해 정리해 보아라                     



4. <참고 5>와 <참고 7>을 읽고 폭력적 저항운동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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