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동아일보 일본을 위한 전쟁을 독려하다!!
황국신민화 정책 -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본격적으로 펼친 황국신민화 운동은 전체주의적 동원 방식으로 한국인에게 황국신민이 되기를 강제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동화정책과 다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창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내선일체란 "반도(한반도) 사람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회에서건 학교에서건 완전한 황국신민화에 힘을 쏟아 한국인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일본인처럼 천황에 절대복종하는 인간형을 주조해내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황국신민화 운동은 천황제 파시즘 또는 군국주의 파시즘에 순응하는 인간 만들기 운동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비슷한 비인간적인 운동이었다. 이 같은 운동이 전체주의적 동원 방식으로 전개된 까닭은 한국인의 민족의식, 독립의식을 말살해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수행하는데 인적・물적 병참기지 요원의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한국인의 인권을 참혹하게 짓밟혔고, 한국인의 인간 의식은 비상한 위기를 맞았다.
중일전쟁 도발 직후인 1937년 7월 22일에 조선 총독부는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제정해 모든 직장・학교・마을에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국기게양 등의 행사를 벌였다. 뿐만 아니라 '황국신민서'를 제정했으며, 국방헌금을 받았고, 전승 축하 행사 등을 열었다. 이와 함께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궁성을 향해 절을 하게 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정오 묵도(正午黙禱)를 강요했다. 이 밖에도 1937년 8월에는 고대 일본의 무도 정신을 실현시켰다는 '황국신민 체조'가 만들어졌고, 1940년 2월부터 한국인이 오랫동안 써왔고 중시했던 성(姓)과 이름을 일본인의 것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실행했다.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 천황의 충량한 신민을 만들기 위한 황국신민화운동과 동아시아 침략전쟁을 찬양・미화하는 데는 한국의 기독교・불교・유림 등의 종교지도자들, 문인, 지식인들이 대대로 동원되었다.
창씨개명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
① 창씨하지 않은 사람의 자제에 대해서 각급 학교의 입학·진학을 거부한다.
② 창씨하지 않은 아동에 대해 일본인 교사는 이유 없이 질책·구타해 아동으로 하여금 부모에게 애원해 창씨 시킨다.
③ 창씨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를 불문하고 총독부 관계 기관에 일체 채용하지 않고, 현직자도 점차 파면 조치한다.
황국신민화 운동을 벌인 이유
왜 일제는 한국에서 극단적인 황국신민화 운동을 벌였을까? 중일전쟁 이후 부족한 노동자들의 징발(徵發)이 중요 이유의 하나였다. 일본은 이 시기에 1939년 7월 국민 징용령을 발포하고 1941년부터 한국인은 육해군 군인으로 징발되었고, 일본의 공장과 광산 등으로도 한국인을 징용으로 끌고 갔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 노동자는 도망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자료에 의하면 1941년의 경우 4만 3,031명으로 집계되었다. 일본 규슈의 야마다 광산의 경우 도망률이 1942년 67%, 1943년 42%, 1944년 44%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 노동자들은 군대식으로 조직되고 통제되었다. 일본에 강제 연행된 노동자들을 최대한 부려먹고, 도망을 막기 위해서도 한국인들을 철저히 황국신민으로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노동자로 부려 먹기 위해서는 일본어 습득이 중요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황국신민화 운동은 전체주의적 총력전 형태로 전개된 천황제 파시즘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만주 침략에서부터 시작된 15년 전쟁,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는 프랑스 도는 다른 백인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한국인 사병이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징병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확대로 2,000만 명이 넘는 조선의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제는 결국 조선과 만주는 하나라는 선만일여(鮮滿一如)를 제창했고, 아무런 사심 없이 일본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조선인 병사를 만들고자 하였다.
일제는 징병제 실시의 전 단계로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발포하여 그해부터 지원병을 모집했다. 지원병 자격으로 가장 중시한 것이 '사상의 문제'였고, '주의자'를 극도로 경계했던 것은 결국 군대와 황국신민화 정책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1938년에 406명이던 지원병은 해마다 증가하여 1943년에는 6,300명에 이르러 총 1만 7,644명이었으며, 1943년 5월 해군특별지원명령에 의해 3,000명이 입소했다. 일본은 지원자 수를 늘리도록 각 지역에 강제 할당하였고, 그것을 황국신민화의 척도로 선전했다.
일제는 1943년 10월 학도특별지원병제를 결정하여 1944년 1월 국내 재학생 959명, 귀성 중이던 유학생 1,431명, 일본 재학생 719명, 졸업생 1,276명 등 총 4,385명을 입영시켰다.
1944년부터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그해 9월부터 한국인을 입대시켜, 육군 18만 6,980명, 해군 2만 2,290명 등 20만 9,270명을 끌고 갔다. 군대에서는 일본어만 쓰게 되어 있었고, 한국어는 절대 금지했으며, 통신도 일본어로만 하게 했다.
이렇게 중국과 필리핀, 남양군도, 그 밖에 동남아 각지로 끌려간 한국인들은 일제 패전 후 연합군에 의해 전범으로 처형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황국신민화 교육
황국신민화 운동은 역시 교육에서 그 성격을 잘 드러냈다. 1938년 조선 교육령을 개정, 공포하여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바꿈으로써 사실상 폐지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마련된 소학교 교육방칭 1항은 "국민도덕 함양, 국체의 본의(本義:근본이 되는 취지)를 명징(明徵: 분명한 증거) 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자각, 진기(振起:기운을 떨침)하여 황운(皇運:황제나 황실의 운명)부익(扶翼: 보호하고 도움)의 길에 철저하도록 한다"라고 규정돼 있다.
일본은 이러한 교육 이념 하에 황국신민화 교육으로서 국사 교육의 개정을 실시하였다. 1941년에 개정된 <초등 국사> 6학년용은 맨 앞에 '제1 황국의 목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이상'등이 실려있다. 1944년에 나온 조선총독부의 <초등 국사> 제 6학년 개정판은 머리 부분에 '황국의 목표'를 무려 4면에 걸쳐 실었다. 거기에는 1943년 11월 일본 동경에서 대만, 만주, 필리핀 등 6개국 대표가 모여 ㉡대동아 회의를 열어 대동아공영의 결의를 다지고 천황의 궁중 초대에 감격하여 동아시아가 일체임을 다짐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5면에는 '팔굉일우의 이상'이라는 제목 아래 역시 '대동아' 침략 전쟁을 미화하여 기술하였다.
<자료 1> 조선 총동원령
<자료 2> 남면북양 정책
<자료 3> 조선·동아일보의 친일 행위
참고> 일본 민족 정론지 조선일보·동아일보
얼핏 보면 신문기사의 큰 제목 같지만 사실은 일제 당시 한 국내 신문에 실린 광고 선전 문구들이다. 기사보다도 훨씬 노골적으로 친일 성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당시의 자사 신문을 두고 ‘민족지’라고 강변해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에는 친일 기사 이외에도 지면 하단부 광고란에는 이 같은 친일 광고가 수도 없이 많이 실렸다. 두 신문 가운데 대량의 친일 광고를 게재한 신문은 조선일보 쪽이다. 조선일보는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 이후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하는 광고를 잇따라 게재했다. 기사에서 일본군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그 아래 광고란에서는 이들에게 위문품을 보내자거나,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는 문구를 담은 상품광고를 버젓이 게재했다. 특히 이 신문들은 일부 친일기업인들이 전쟁 특수를 노려 '후방의 위문대(袋) 지원은 전선과 후방을 잇는 가교라고' 선전해대자 이에 발맞춰 현란한 군국주의 문구와 함께 전선의 군인을 등장시켜 전쟁 분위기를 한껏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일제하 조선일보에 게재된 친일 성향의 광고는 총 340여 건으로 나타났다. 시기별로는 만주사변 이후(1932.3~1933.5) 14건, 중일전쟁 이후 폐간 때까지(1937.7~1940.8) 326건 등이다. 또 조선일보의 자매 월간지인 ‘조광(朝光)'에 게재된 친일 광고 건수는 70건 정도로 집계됐다. 이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보다는 적은 양이지만 경쟁지였던 동아일보보다는 훨씬 많은 수치다. 조선일보는 만주사변 발발 후인 1932년 3~4월경에는 '부상 전사를 위로합시다'정도의 친일 광고를 실었으나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과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담은 광고를 실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중일전쟁 발발 2개월 후인 37년 9월 7일 자에는 총후(銃後), 즉 후방의 주민들을 상대로 '총후의 책무, 국가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담긴 상품광고를 실었으며, 조선일보 6,000호 기념호인 이듬해 3월 1일 자에는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문구가 담긴 인단(仁丹) 광고를 실었다. 또 이해 5월 5일 자에는 '군민일여(軍民一如) 거국적 국가보국(報國)'이라는 선전문구의 아지노모도(일본 조미료 업체)의 광고를 실었으며, 6월 8일 자에는 '장기전(長期戰)에 준비하자'는 모리나가 건빵의 광고를, 11월 16일 자에는 '중지(中支)에도 남지(南支)에도 황군(皇軍)의 기(旗)빨이 휘날리게' 라며 멘소래담 광고를 실었다. 특히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37년 9월 7일 자에는 어린이들이 일장기와 총, 일본도(刀)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는 그림과 함께 '총후의 책무 국가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를 게재하였는데 이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을 선전매체로 동원하여 침략전쟁을 미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광고는 어린이들에게 단순히 전선에 위문대를 보내자는 정도가 아니라 '어린이는 내일의 일본군'(1937.10.28), '작은 용사'(1937.11.14)라고 지칭하면서 '애기들이 자라나면 일본이 성장한다'(동아일보, 1939.11.18)고 강변하는가 하면,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건아 만세! 뻗어 나는 일본의 저력'(매일신보, 1943.4.15)이라며 어린이들을 '미래의 전사(戰士)'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역시 상당수의 친일 광고를 게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1년 1월호에는 '축(祝)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신춘(新春)'이라는 문구의 인단 광고를 실었으며, 이듬해 2월호에서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일억일심(一億一心) 총동원' 광고를 실었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징병제가 실시되자 1943년 6,7월호에서는 '축(祝) 징병령시행' 문구의 광고를 실어 은연중에 징병제를 선전하였으며,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전쟁에서 최후까지 이겨내기 위하여'(1944.6월호) '싸우는 여성은 강하다'(1944.5월호) 등의 자극적인 문구를 담은 광고물 게재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운현(친일문제연구가)
<자료 4> 문학인들의 친일 행위
"8.15에 관해서는 도시나 몇 군데를 빼놓고는 거의 다 이튿날 알았다고 합니다. 방송을 듣고도 한참 동안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다더군요. 춘원 이광수의 경우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이광수는) 계속 친일행각을 하면서,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황의 항복 방송도 못 듣고 이튿날을 맞았다고 합니다.
김동인은 더욱 참담하여 바로 그 8월 15일 오전 10시에 총독부 아베 정보과장 겸 검열 과장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효과적인 친일행위를 할 수 있도록 새 문인단체를 만들 테니 허가해달라고 조르려던 참이었습니다."
- 리영희의 『대화』中
<자료 5> 몸뻬바지의 탄생
1. 일본이 창씨개명을 하기 위한 수단을 요약하여 설명해보아라
2. 이전에 학습한 내용과 본문의 내용을 참고하여 <자료 1>과 같이 국가 총동령원을 원인과 목적을 설명해보아라
3. ㉠의 깊은 관련을 설명해보아라.
4. ㉡과 같이 대동아 공영을 강조한 목적은 무엇인가?
5. <도표 1>과 <자료 2>를 참고하여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40년대의 조선 식민 공업 정책의 목적을 설명해보아라.
6. <자료 4>을 읽고 조선/동아일보가 청소년과 어린이에게 했던 친일적 광고행위를 정리해보아라
7. 몸뻬 바지의 탄생 배경을 설명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