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국. 세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서다!!
읽기 전에 공부하기!!
•베르사유 조약
•파리 강화 회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
•공황
•보호무역
•수입쿼터제(수입할당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
1919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 조건을 청하기 위해 전승국 27개 나라가 참가한 가운데 파리에서 강화(講和) 회의가 열렸다. 이후 전승국들은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을 시작으로 가각의 패전국들과 평화 조약을 맺어 전후 처리를 마무리하였다. 그 결과 탄생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 한다.
파리 강화 회의의 기본 원칙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4개 조 평화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전승국들은 윌슨의 이상주의적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평화 조역의 내용을 결정하는데 더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자국의 이익과 패전국, 특히 독일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었다.
한편 패전국들은 전승국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 조역의 내용을 일종의 명령으로 느껴 이를 한결같이 거부하였다. 특히 독일인들에게 베르사유 조약은 충격이었으며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으로 여겨졌다.
독일은 본국의 영토 축소와 모든 해외 식민지의 포기, 그리고 군비 축소를 받아들이고,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며, 세계대전을 일으킨 유일한 책임자로 낙인찍혔다.
㉠식민지 문제 해결에 있어서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패전국들이 지배하였던 식민지는 전승국들에게 다시 분배되었다. 독일의 아프리카는 영국・프랑스 등이, 태평양 및 동아시아의 식민지는 일본 등이 나누어 가졌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였던 중동 지역의 영토들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각각 분배되었다. 결국 베르사유 체제 아래에서 세계질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강대국의 패권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재편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와 재정상의 위기는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난관이 되었다. 특히 독일이 부담해야 할 엄청난 배상금 문제는 유럽의 재건을 어렵게 만들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거의 파탄 상태에 이른 독일은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산업의 타격을 입고 미국의 채무국으로 전락한 영국・프랑스 등 전승국의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번영을 누린 나라는 미국이었다. 유럽 열강들과는 반대로 미국은 전쟁을 통해 혜택을 받았다. 전쟁 후 미국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하였고, 중공업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특히 1920년대 중반부터는 대호황을 누렸다.
│자료 1│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참고│윌슨의 14개 조(1918년)
우리가 이 전쟁에서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특별히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살기에 적합하고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하고, 특히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자신의 제도를 스스로 결정해 갖고 싶어 하고, 다른 민족들로부터 폭력과 이기적 침략을 당하지 않음은 물론 정의롭고 공평하게 대우받기를 바라는 모든 평화 애호 국가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 평화협정은 공개적으로 체결되어야 하고, 또 그 조항은 공개되어야 한다. 어떠한 종류의 국제 비밀 협정도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외교 관계는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맺어져야 한다.
4. 한 나라의 군비는 국내의 안전 보장에 필요한 최저 수준으로 감축하기로 서로 약속해야 한다.
5. 식민지의 주권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이 문제와 관련된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장래에 그 주권을 결정하게 될 정부의 정당한 주장과 같은 비중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바탕 위에서 모든 식민지의 주장을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어느 한 편에 조금도 치우침 없이 다루어야 한다.
14. 강대국이나 약소국 모두에 대해 서로 간에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여러 국가로 구성된 연합체가 특별한 협약 아래 형성되어야 한다.
│참고│당시 미 국무부 대변인 성명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윌슨 대통령의 선언은 일본제국 영토 내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요컨대 일본이 조선을 제국 영토의 일부로 만든 것은 이미 확실하기 때문에 이제야 조선을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자는 제안은 이무래도 불가능하다.
│자료 2│ 민족자결주의와 3・1 운동
참고> 3․1 운동에 반대한 조선인들
일한병합(日韓倂合)은 조선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실로 가장 좋은 방법이, 가장 적절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결코 헛되이 독립하여 한때 유쾌함을 얻으려다 가는 나라의 백년대계를 그르치는 것이니, 환언하면 작은 것을 얻으려다 (나라의 발전이라는) 큰 뜻을 잃게 될 것이다.
<1919. 4. 27. 경성일보>
윤치호 : ① 조선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피해자가 아니므로 민족 자결의 이유가 없다. ② 설사 독립한다고 하더라도 자립 능력이 없다. ③ 강자와 약자가 서로 화합하고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파리장서 사건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 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式)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자료 3│미국의 번영
'새 시대', '재즈시대', '황금의 20년대'. 주류 정치인들과 언론들을 1920년대의 미국을 이런 말들로 찬양했다.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로 부상했다. 영국과 독일이 서로 공격하는 동안, 미국은 영국 해외 투자의 상당 부분을 인수하면서 계속 성장했다. 이러한 전시 이득에 따른 과잉 자본을 서유럽이나 중남미에 수출했고 건축과 소비재 산업에 대한 투자를 함으로써, 생산력과 자본력을 갖추게 된 미국은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1928년에는 1914년의 두배에 달하는 산출량을 달성했다.
세계 대공황. 히틀러가 탄생하다!!
●파시즘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사회・경제적 혼란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우파 정치 운동과 이념이 출현하였다. 특히 전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기대하였던 영토를 얻지 못하자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가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무솔리니는 참전 군인과 소시민층을 규합하여 파시스트당을 만들어 전체주의를 미래의 대안으로 내세웠다. 파시스트당은 반자유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급진 민족주의를 내세워 자본가, 대지주 및 공무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 운동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1922년 무솔리니는 로마 진군을 통해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이루어진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일당 독재체제를 만들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독일을 비롯한 다른 여러 유럽 국가에서 그와 유사한 운동 모델로 이용되었다. 특히 대공황 이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장학한 것을 계기로 유럽 내 20여 개 국가에서 파시즘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대공황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대신하여 세계 경제의 중심 국가로 부상한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29년 뉴욕 증권 시장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금융 위기가 시작되었다. 생산 설비의 과잉 투자에서 비롯된 금융 위기는 은행과 기업 및 공장의 연이는 파산, 농산물 가격의 폭락, 그리고 대량 실업 사태로 이어졌다.
미국의 경제 공황은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경제에 의존하고 있었던 유럽 및 아시아 지역의 은행과 기업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에 미친 여파는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미국 은행들이 빌려 주었던 차관을 한꺼번에 회수하면서 독일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은 뉴딜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미국 경제는 고전적인 자유방임주의를 탈피하여 국가가 경제 활동에 적극 개입하고 대규모 복지 정책을 실시하는 ㉢수정 자본주의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보호 무역주의를 통해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본국과 식민지를 묶는 배타적인 블록경제를 만들어 공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내 시장이 좁고 식민지가 없거나 많지 않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가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뉴딜정책
미국 제32대 대통령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수정을 하였던 점으로 미국 역사상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 기존의 시장의 원리로 받아들였던 자유방임주의를 부정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경제 개입이라는 자본주의의 획기적인 변화로 대표적인 사업으로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를 통한 고용창출 등이 있다.
│자료 4│ 케인즈와 뉴딜정책
"개인들이 경제 행위와 관련하여 타고난 '자연적 치유'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이 세상은 사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을 항상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되지도 안으며, 그렇게 관리될 수도 없다. 개인들이 서로 고립된 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노력할수록, 사회적 이익은 희미하게 추구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 “
- 케인즈 "The End of Laissez-faire" 1926. 中에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현대 과학의 경이적인 발달에 의해서 야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을 정부의 조치에 의해 해결하려고 적극 노력하지 않는 국가나 정부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 것이며 결국은 사멸할 것“
(1928 뉴욕주지사 시절의 루스벨트)
"정부를 통해 움직이는 현대 사회는 그들 스스로 꾸려 나가려고 애쓰나 능력이 모자라는 동포는 누구나 그들의 기아나 빈곤을 막아야 하는 명확한 의무를 져야 한다"
"최선의 개인적인 성취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 한편, 동시에 인간의 이기적 동기에서 생기는 장애와 불공평을 제거하려고 모색한다"
(1935년 10월 2일. 루스벨트의 샌디에이고 연설)
●전체주의 국가의 부상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에서 나치즘이 권력을 장악하자 전체주의의 위험이 현실화되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주로 자영업자 등 소시민이 지지하는 소수 정당에 불과하였으나, 경제 공황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무능한 기성 정당들에 실망한 국민 전 계층이 지지하는 대중 정당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1932년 총선에서 나치는 제1당이 되고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함으로써 독일은 히틀러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히틀러는 총통(總統)이 되어 제3 제국을 선포하고 일당 독재 체제를 만들어 정치적 반대자와 사회적 소수자,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와 박해, 인권 유린을 자행하였으며,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지배를 실행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체제가 등장하였다. 대공황 이후 일본 경제는 급격히 침체되었고, 특히 농촌 경제의 몰락은 심각하였다. 이에 군부세력이 전면에 나섰다. 1931년 일본 군부는 만주를 무력으로 침공한 뒤(만주사변), 괴뢰 만주국을 세워 일본의 세력원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며(1937년. 중일전쟁),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자료 5│ 대공황과 나치즘의 성장
(가)
재즈 시대의 희망은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무너져 내렸다. 그날 미국의 주가는 거의 3분의 1이나 폭락했다. 이런 붕괴는 좀 더 뿌리 깊은 체제의 결함이 드러난 것이었다. 붕괴가 시작됐을 때, 독일・미국・영국의 경제는 이미 하향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생산량이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했고, 미국 경제가 그 곤두박질의 선두에 있었다. 1930년대 말 무렵에 세 나라의 생산량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침체기보다도 낮았다. 1931년과 1932년에는 1930년보다 상황이 더 악화돼, 미국의 지방 은행 5천 개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은행 2개가 파산했다. 1932년 말까지 세계 산업 생산량은 3분의 1이 줄었고, 미국의 생산량은 46퍼센트나 감소했다.
그토록 심각하고 오래 지속된 불황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공황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났지만 회복의 조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독일 노동자의 거의 3분의 1, 그리고 영국 노동자의 5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 각국 자본가는 앞 다투어 자기 나라의 통화가치를 낮추어 경쟁자들보다 싼 값에 상품을 팔려고 애썼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줄줄이 관세와 수입쿼터제를 도입해 세금을 물리고 물량을 제한함으로써 수입을 억제했다. 국제 무역량을 3분의 1로 떨어졌다.
(나)
(독일은) 실업률이 영국보다 50퍼센트쯤 높았고 중간계급 상당수가 극도의 궁핍으로 고통을 겪었다. 공황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나치) 당에 대한 지지율이 치솟았다. ……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온건'부르주아 정당을 떠나 히틀러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들이 지지하던 정부가 위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중간 계급 지지자들까지 빈곤과 파산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 세계 공황으로 이윤에 타격을 입게 되자 일부 자본가들이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히틀러에게 돈을 대 준 적이 없을뿐더러, 가난해진 중간 계급들을 기반으로 독립적으로 성장해온 나치즘 운동을 불신하던 대다수 기업가들조차 나치당을 쓸 만한 도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기업가들은 히틀러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점점 더 갖게 됐었다. …… 나치의 통치는 대기업가들과 군 장교단의 직접적인 동의를 기반으로 유지됐다. 나치당이 억압 수단과 정치 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나치의 폭력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그들은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고 군비를 확장했다.
- <민중의 세계사>- 6. 대공황 中에서...
여기서 잠깐!!
1. <자료 1>을 참고로 ㉠의 내용과 같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보아라
2. <자료 2>를 참고고 윌슨의 14개 조 원칙이 우리나라의 3.1 운동에 미친 영향을 설명해보아라
3. <자료 1>과 <자료 2>를 참고로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한계를 설명해 보아라.
4. <자료 3>을 참고로 ㉡과 같이 미국이 1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서술해보아라.
5. <자료 4>를 참고하여 ㉢의 수정자본주의의 성격을 설명해보아라
6. <자료 5>를 참고하여 ㉣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설명해보아라.
이건 뭘까?
일본은 왜 영국 혹은 미국과 달리 ㉤과 같이 전쟁을 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