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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Nov 03. 2021

14. 일본의 패망과 해방

일본의 패전과 건준 수립 

| 해방 

 일본 천황, 항복을 선언하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항복 조서를 읽기 몇 시간 전 조선총독부에서 총독 다음의 위치에 있는 정무총감 엔도가 여운형을 만나 치안협조를 요청했다. 일제 말에는 황국신민화 운동의 강화, 각종 공출(供出;일본이 식량과 물자 등을 강제로 바치게 한 일)등 수탈의 심화, 징용‧징병 등 강제연행으로 한국인의 대일 감정이 더욱 악화되어 있어서, 일제의 패전 소식이 알려지면 한국인들로부터 일본인이 어떻게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한국인한테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여운형을 기다렸다는 듯이 엔도에게 정치범‧경제범의 즉시 석방, 치안유지와 건설 사업에 방해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이제는 조선총독부 대신 한국 측이 치안을 맡고 국가건설사업을 벌여나가겠다는 발언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은 갑작스런 항복 소식에 몹시 당황했기 때문에 여운형의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패망할 때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중경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산하에 광복군이 있었다.(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1942년 중국 화북 지방에서 조직된 조선독립동맹은 중국 공산당 지원 아래 주로 연안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산하에 조선 의용군이 있었다. (주석 김두봉) 1932년부터 중국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였던 김일성 등 빨치산 부대는 1940년대 초에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집결해 있었다. 태평양 너머 미주에서도 이승만 등이 독립운동을 했다. 이처럼 독립운동 단체들이 멀리 있었기 때문에 해방은 중도좌파인 여운형이 국내 좌우 세력을 비밀리에 결집시켜 조직한 건국동맹이 중심이 되어 맞았다.

 1945년 8월 15일부터 여운형과 그의 동지들은 건국 준비에 박차를 가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해 위원장에 중도좌파인 여운형, 부위원장에 중도우파인 안재홍을 추대하는 등 좌우 세력을 균형 있게 배치했다. 건준은 전국 각 지역의 건준 지부를 통해 현존 시설‧기계‧기구‧자본 등을 보존‧관리하는 한편, 8월 16일부터 치안대를 전국적으로 조직해 치안확보에 나섰다. 건준은 평안남도‧함경남도‧황해도의 건준 지부를 포함해 8월 말까지 145개 지부 및 그와 비슷한 숫자의 치안대 지부가 설립되었다. 

 한국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해방 당시 남한의 인구는 터키‧이란‧필리핀‧아르헨티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20,016,000여 명) 소련 군대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와 함께 8월 9일 두만강을 넘어 공격해 일본군과 전쟁을 했지만, 치스차코프 대장의 주력군이 북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평양에 도착한 것을 8월 26일이었다. 미군의 하지 중장의 24군단은 9월 8일 인천을 거쳐 9일 서울로 들어왔다.

 미군과 소련군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었다.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왔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일제 패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군은 ‘점령군’으로 왔다는 것을 명시하고 치안협조를 당부했다. 소련군은 간접 통치 방식을 택했는데, 미군은 패전국 일본에서 간접 통치를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군정(美軍政: 미국의 군인에 의해 행해지는 정치형태)을 설치해 직접통치를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일제통치기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제에 복무했던 친일관리들도 그대로 일을 시키거나 승진시켜 불만을 샀다. 특히 해방이 되자 두려워서 피신했던 친일경찰을 불러들인 것은 원성의 표적이 되었다. 미군은 친일행위자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잘했다면 자기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일할 것이라고 믿었다. ㉠주한미군의 현상유지 정책은 미국의 대일정책과도 달랐다. 일본에서 미국은 점령 초기에는 재벌해체, 군대해산, 전범재판, 토지개혁 등 상당히 급진적인 현상타파 정책을 썼다. 

     미군이 한국에서 현상유지 정책을 편 것은 강력한 좌익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좌익이 소련과 연결되어 있다는 극우적 시각이 작용했다. 지주‧부르주아 세력은 상당수가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면서 황국신민화 운동에 가담한 반면, 적지 않은 좌파가 지하투쟁을 했기 때문에 해방 직후 지주‧부르주아 세력은 목소리가 약했지만 좌파는 대중적 영향력이 있었다.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기 직전인 9월 6일, 1920년 초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해온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우익이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맞아들이려는 임정 추대운동을 벌이자 건준 후신으로 인민공화국(인공)을 급조했다. 인공의 인민위원과 각 부서장에 우익도 들어가 있었지만,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인공은 건준 지부를 인민위원회로 바꾸고, 면‧동‧리에도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남한의 거의 대부분의 군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군 인민위원회의 절반 정도가 실질적으로 활동했다.

 미국은 좌익‧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한편, 지주‧부르주아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 민주당(한민당)을 강력히 지지했다. 또한 미국은 10월 16일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귀국시켜 적극 지원했다. 11월 하순에는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남한은 점차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커져갔다. 우익은 중경 임시정부 추대를 주장했고, 좌익은 인공을 지지했다.


자료 해방 전후의 조선 민중


"....... 해방되던 그때 적어도 조선인의 절반 정도는 일본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거요. 그러니까 그중에서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으면서 울었거나 눈물 흘린 사람도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은 완전히 일본인이 된 이광수나 그 밖의 적극적인 친일파와 같은 상부 계층의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하층 조선인들 사이에도 많았어요.......(중략)....... 나는 그다음 날(해방 다음날) 면민(面民)들이 모여서 축제를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갔지요.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는 정확히 예측할 능력이 없었지만, ㉡하여간 노동을 하기 위해서 학교에 돌아갈 필요가 없고앞으로 굶주리지 않고 실컷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반가운 마음뿐이었어요. 민족해방이라거나 독립국가 건설이라거나 하는 거대한 미래를 예측할 만한 상황판단은 나에게는 아직 어려웠어요. 오히려 농민들이 곡물 공출을 안 해도 되고, 젊은 남녀는 징병이나 징용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변화가 모두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만세를 부르게 한 거예요........"

 - <대화리영희> pp68-69 에서     



자료 건국준비위원회 선언


여운형과 건준 

그러면 차제에 우리의 당면 임무는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 있다. 일시적으로 국제 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다.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자유 발전의 길을 열기 위한 모든 진보적 투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나니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의하야 우리의 건국준비위원회는 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준비 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 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 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야 각층 각계에 완전히 해방된 통일전선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주의적 반동세력에 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어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고 금후에도 그들은 해방 전 조선을 그 건설 도중에서 방해할 가능성이 있나니 이러한 반동세력, 즉 반 민주주의적 세력과 싸와 이것을 극복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구성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해방운동에 투신하여온 혁명전사와 그 결집체에 대하여서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야 전심적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야 조선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거름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 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야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세운다.     

강령 

1.

2.  

3.      



자료 1940년 무렵 임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인식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의 어떠한 일부에 대해서도 행정권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오늘날의 한국 민중을 대표한다고 간주될 수도 없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심지어 망명 한국인 들 가운데도 극소수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미국 의회 자료>



1. ㉠과 같은 미국의 정책이 친일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2. 미군의 ㉠과 같은 정책을 펼친 이유를 <자료3>을 참고하여 두 가지 이상 서술하시오     


          

3. <자료 2>를 분석하여 건국준비위원회가 내걸고자 했던 강령의 빈칸을 채워보아라.  


              

4. ㉡과 같이 당시 중학생이었던 리영희가 노동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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