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계단을 따라 휘어지는 골목 끝자락에 희부연 빛이 감돌았다. 올드 뻬용은 미리 계획된 여정은 아니었다. 뻬용 숙소 주인이 차로 십분 거리에 아직 16세기 모습 그대로 사는 마을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다음날 아침, 프로방스의 햇살이 아직 뜨거워지기 전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달달거리는 피아트 렌터카를 타고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갔다.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고, 내비게이션은 계속해서 산 위를 가리켰다. 예상 도착 시간을 훨씬 넘겼지만 결국 뻬용(?)에 도착했다. 아름다움에는 간격이 필요한 법일까. 막상 전날 산 아래서 바라보았던 절경 속으로 들어오니 동화의 성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가까이 보는 풍경 안에는 프로방스의 단정하고 소박한 정취가 자리했다.
여기까지만으로도 근사한 아침이었다. 숙소로 되돌아오는 길에 진짜 뻬용(Peillon)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발견했다. 아뿔싸! 우리가 갔던 마을은 'Peille(뻬이유)'였던 것이다. 구글 지도에 적힌 지명을 헷갈린 탓이었다. 내친김에 원래의 목적지로 다시 향했다.
오래된 뻬용 곳곳에는 눈앞 풍경을 빼닮은 기념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로부터 백 년이 흘렀어도 마을은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치형 돌문, 문 앞에 놓인 커다란 항아리 화분, 바닥돌이 이루는 우아한 무늬, 선이 아름다운 철제 난간, 개성 있는 문과 문고리, 고풍스러운 펌프... 우연히 마주친 진경(珍景)을 두 눈 가득, 그리고 마음에 꼭꼭 눌러 담았다. 보물섬에 당도한 듯 그렇게 길을 헤매느라 시간도 잊었는데... 돌계단 저 너머로 불쑥 누군가 나타난다면? 브레송도 뻬용을 알았을까? 갈 길 급한 여행자에게 결정적 순간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