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숨은 의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보다는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믿음직스럽다. 같은 맥락에서 무언가 확신하는 말투보다는 어떤 여지를 남기는 말투에 난 더 믿음이 간다.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말하는 '모르겠다'라는 말은 대체 왜 이렇게 답답하고 못마땅한 걸까? 나는 분명 그의 여지를 남기는 말투를 사랑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말투 때문에 종종 외롭다. 남자친구의 '몰라'는 내게 선택권을 주는 자상함이었다면, 남편의 '몰라'는 그가 우리 공동의 문제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다. 그럴 땐 이런 생각이 든다. 몰라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면 알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뒷짐 지고 서서 '모른다'라고 말할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이런 상황은 매우 사소한 일에서부터 발생된다.
"오늘 저녁 뭐 해 먹지?"
"음.. 모르겠네."
계속 이런 식이면 결국 저녁 메뉴 고민은 내 몫이 된다.
"다음 휴가 때 숙소를 이 둘 중 어느 쪽으로 잡을까?"
"음... 잘 모르겠네."
계속 이런 식이면 결국 휴가 계획은 오로지 내 몫이 된다. 유일한 복수는 미러링이다. 남편이 이렇게 묻는 순간.
"다음 주말에 뭐 할까?"
머릿속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꽁꽁 숨긴 채 이렇게 대답해 본다.
"음.. 모르겠네."
계속 이런 식이면 남편이 다음 주말 계획을 세운다.
모른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무책임한 말이 된다. 책임을 상대에게 미루는 말이 된다. 모를 수 있다는 것은, 몰라도 된다는 것은 무책임과 무지를 넘어 권력의 표시가 되기도 한다. "난 잘 모르니까 박대리가 알아서 좀 잘해줘."라는 말이 날 엿먹이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되살아 난다. 어학연수와 영어 학원에 돈을 쏟아부으면서, 영어원어민은 제2외국어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던 억울함도 떠오른다. 운 좋게 영어 사용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언어 권력을 획득한다. 그들은 굳이 다른 언어를 몰라도 된다.
모른다는 말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의미와 의도, 사회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솔직한 '몰라'는 용기가 필요해서, 내가 조금 더 연습해야 하는 말이다. 무책임한 '몰라'는 내게 적극성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권력의 '몰라'는 주변을 돌아보며 무지를 부끄러워할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