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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관웅의 tellmewine Apr 15. 2019

14. 엉 프리뫼르의 이상한 경제학

@와인, 알고 마실까요? - 2부 와인의 경제학

매년 4월 초 보르도 200개 안팎 샤또 와인을 시음하고 선구매하는 행사에 전 세계 와인업계 발걸음 몰려     



매년 4월 초가 되면 전 세계 와인 네고시앙과 수입상들이 프랑스 보르도로 몰려듭니다. 보르도 내 200개 안팎 유명 샤또들이 전년도 가을에 포도를 수확해 담은 와인을 시음하고 선구매를 하는 ‘엉 프리뫼르(en primeur)’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입니다.     


발 디딜 틈 없이 행사장을 빼곡하게 채운 구매상들은 저마다 부스를 돌며 1000여 개 넘는 와인을 시음한 후 꼼꼼히 수첩에 적고 비교하며 구매 여부와 수량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구매자들이 한결같이 가격을 묻거나 흥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와인 구매 가격은 그해 6월이나 8월께 해당 와이너리가 결정해 구매자에게 통보합니다. 그러면 구매자는 바로 잔금을 입금한 후 18~24개월이 지난 후에 와인을 수령해가게 됩니다.     


그러나 와이너리의 가격 결정 과정에는 로버트 파커나 젠시스 로빈슨 같은 유명 평론가의 입김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이들은 이 행사가 열리기 한두 주 전에 조용히 와서 와인을 시음한 후 나중에 평가와 평점을 매긴 리스트를 공개합니다. 이 리포트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구조입니다. 


엉 프리뫼르 행사에 참가한 주요 와이너리들이 행사장에 모여 환호하고 있다.(사진=UGCB 홈페이지)

    

가격 묻지도, 흥정하지도 않고 구매하고 선금 납입… 로버트 파커나 젠시스 로빈슨 같은 유명 평론가 입김 절대적


그런데 물건을 사면서 가격도 모른 채 구매 여부와 수량을 결정하고 바로 선금까지 보내야 하고, 나중에 정해지는 가격조차 극소수 몇 명의 입맛과 취향에 의해 결정된다니…. 그 가격도 해마다 빈티지 별로 편차가 엄청나게 큽니다. 시장경제에서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일이죠.   


엉 프리뫼르를 통한 구매는 우리나라 분양시장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수요자가 아파트를 사려고 하면 청약을 하기 위해 견본주택을 방문하고 분양가는 물론 입지, 평면, 향후 발전 가능성을 꼼꼼히 따져본 후 청약을 하고 당첨되면 계약금을 넣은 후 2~3년 뒤에 잔금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수요자가 분양가도 모른 채 구매를 해야 하고 나중에 극소수의 몇 명이 전국의 모든 분양가를 결정한다고 하면 이를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엉 프리뫼르에서는 이 같은 구매시스템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보르도의 와인 값은 어찌 보면 이 같은 이상한 구매 구조를 통해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진=UGCB 홈페이지)


엉 프리뫼르는 역사가 150년이 넘습니다. 초기에는 와인이 출시되기까지는 2년이 걸리게 되므로 와이너리는 선 구매를 통해 자금을 빨리 회수해 경영난에 도움이 되고 도매상들은 2년 후 출시될 때보다 저렴한 가격에 와인을 살 수 있어 서로가 윈윈 하는 좋은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아시아 등지의 일부 지역에서 묻지 마 식 구매가 확산되고 일부 전문가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가격이 서너 배 이상 올랐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죠.          

       

엉 프리뫼르 와인들은 신생아…4~5개월 모습 보고 ‘2년 뒤 맛’ 점치는 게 가능할까 



그럼 좀 더 꼼꼼히 따져볼까요. 엉 프리뫼르는 그 전년도 가을에 포도를 수확해 그 해 4월에 임시로 뚜껑을 열어 맛을 보고 평가한 후 18개월 이상 숙성을 거쳐 병입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즉, 엉 프리뫼르에서 보이는 와인들은 사람으로 따지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아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를 보고 향후 이 아이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요.      


로버트 파커나 젠시스 로빈슨 등 유명 평론가들이 아무리 예민한 후각과 입맛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제 갓 담은 4~5개월 밖에 안된 와인을 맛본 후 2년 뒤의 맛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까요.      


국내 유명 와인 평론가인 장홍 박사는 그의 저서 '와인, 문화를 만나다'에서 다소 과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 같은 논리를 제기합니다.     


(사진=UGCB 홈페이지)


   누가 로버트 파커의 입맛에 더 맞는 ‘파커 와인’을 잘 만들었나

  

엉 프리뫼르 행사에 나오는 와인은 일반 와인이 아닙니다. 시음 행사를 위해 최상의 조건에서 소량의 와인을 별도로 주조한다는 것이죠. 가장 좋은 포도만을 선별해 특별히 제작한 오크통에서 숙성시키고 모든 테크닉을 단기간에 집중시킨다고 합니다.     


최대한 잘 숙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오크 조각까지 넣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로버트 파커가 바닐라 향과 구운 토스트 향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데 이런 향이 와인에 녹아들려면 적어도 숙성된 지 12개월이 지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엉 프리뫼르 행사는 이른바 누가 더 ‘파커 와인’에 가깝게 잘 만들었는지를 경쟁하는 곳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죠.    

 

좀 더 가볼까요. 이렇게 행사용 와인은 2000~3000병만 생산된다고 합니다. 5대 샤또를 비롯해 대부분의 보르도 와이너리들은 연간 20만 병 이상 생산하는데 전체 생산량의 5%도 안 되는 셈이죠. 그럼 이들 샤또에서 다른 오크에서 숙성되고 있는 나머지 와인들도 특별히 제작된 행사용 와인들과 같은 품질을 보일까요. 아마도 전혀 다른 와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죠..     


고가의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좋아하시나요. 한번 고민해볼 만한 주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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