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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Nov 18. 2022

뜻밖의 데이트

좋은 사람을 만나는 기쁨



          




희뿌연 안개가 낀 늦가을 저녁, 가로수 잎새는 저마다 형형색색의 미소를 뽐내고 떨어진 낙엽은 아쉬움을 날리듯 살포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리며 내게 잠시 머무는 외로움을 안겨준다. 낙엽을 밟으며 차에서 내려 바라보는 하늘에선 달빛이 고요하게 내린다. 온몸으로 가을의 풋풋하면서도 빛깔 찬연한 감성을 맞이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아파트 주변을 감싸며 비치는 달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간만의 데이트 때문일까? 정말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새삼 만난 g와의 해후는 왠지 어색하고 낯설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던 것 같다. 우리가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수능일 오후 투썸이었다.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커피숍이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보단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에서 잊고 있었던 옛 추억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의 가슴 한구석에 또 다른 행복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스며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날들의 흔적이 가끔은 외로움이었나 보다. 나의 안에 만들어진 혼자만의 공간에서 사유하고 예술의 빛과 그림자를 통해 만족하며 누린 시간의 고독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일상화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내 안에 숨어있는 나만의 자유로운 공간에 뜻밖의 데이트는 조금은 두렵지만 내 마음의 침묵을 깨운 음악처럼 따뜻하고 반가웠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게 작은 설렘이 국화꽃 향기처럼 밀려왔다.      




g를 만난 것은 가을바람이 스산한 오후였다. 그동안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데이트는 조용한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사실 g는 10여 년 전에 보험이 인연이 되어 알게 되었지만 별로 사적인 대화를 해 본 적은 없는 사이였다. 어쩌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내 글을 읽어 달라는 뜻으로 지인들에게 보낸 사이트를 통해 전해 온 문자가 시작이었다.

“어머나~ 축하드려요. 잘 읽겠습니다.”

자신의 스토리에 내 수필과 함께 몇 점 올린 한국화 작품을 공유하고 싶다면서 자기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취미가 있다는 말에 공감의 정이 꿈틀거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 곳에서 우린 커피를 마시며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건지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커피와 커피 향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오늘은 왠지 커피 향기보다 그의 삶의 향기가 더 기대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오롯한 감정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엔 삶의 굴곡이 있었지만 담담한 용기와 커피 향보다 향긋한 진실이 묻어 있었다. 모든 대화는 같은 곳을 지향하며 같은 감정을 드러낼 때 침묵의 시간 간격이 좁아진다. 우린 오래전 만난 친구처럼 연인처럼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감정을 아낌없이 쏟아 놓았다.     


나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직함이 알려주는 작가나 화가는 아니지만, 내가 쓴 글과 내가 그린 그림을 나는 좋아한다. 우연의 일치인가? g도 만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그렸다는 만화 그림을 보여주며 신나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g의 소녀 같은 심상이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의 대화는 자신을 찾은 삶의 풋풋한 향기와 함께 그렇게 이어졌다.      


하루 한 가지 행복한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g의 카톡이 감명 깊게 새겨진다. 내 글을 읽고 친구의 소중함을 느꼈다는 g. 시간 될 때 커피 한잔 대접하겠다는 그의 문자에 감동했고 그리움인지 애정인지 모를 환희가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카톡을 통해 전해 온 그의 마음이 외로움을 잊고 지냈던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며칠 후 나는 그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대신해 문자를 보냈다.

“커피 한잔 어때요?”     


g의 얼굴을 기억해내며 나의 제안이 잘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순간, 그의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솔직하고 담백하며 똑똑한 품성 앞에 우려는 기우였다.

“우리 서로 어떻게 부르지요? 호칭이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사장님, 형부, 아니면 그냥 이름?”

“나는 형부가 좋겠어요. 언니와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게 좋지 않을까요?”

어느 순간 나는 생각지도 못한 g의 형부가 되어 그의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잔잔한 행복감에 녹아들었다.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g.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그림을 보면서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는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나는 동감했다. 그림에 대해 평가할 만한 자격은 없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만화 그림 솜씨가 정말 예상외로 뛰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유전자는 속일 수 없으니까.     

 

장애인미술협회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그의 다양한 일상이 좋아 보였다. 요즘은 예전부터 한 암웨이 비즈니스를 계속하며 주로 건강강의를 한다고도 했다. 그의 건강 관련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잠깐 들었지만 피나는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g의 건강강의는 평소에 관련 서적을 읽고 직접 환자를 만나고 스스로 체험한 진정성이 담긴 자신만의 온전한 콘텐츠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내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고, 평소에 물을 잘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면서 자기가 마시려고 가지고 다닌다는 물병을 꺼내 물을 따라 주면서 건강 전도사답게 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와 건강을 위한 물의 소중함을 설명까지 해주는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    

            

g는 고양이를 다섯 마리나 입양해 키우고 있다고 했다. 고양이의 입양 방법은 각기 다르지만 그냥 두면 생명을 잃어버릴 최악의 경우를 비켜 살려낸 그의 마음이 너무 정겹고 좋다. 제각기 다른 상처를 안고 있을 고양이를 키운다는 일은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서 따뜻한 인간 본연의 감정을 읽어 본다. 고양이가 집안에 따뜻한 온기까지 채워준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따뜻한 동물에 대한 사랑이 고양이 사진 속에서 느껴진다. 이런 가을날 g를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은 언제나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내가 정한 속도로 보냈지만, 나의 삶의 방식이 괜찮은지 궁금해졌다.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마음의 설렘 같은 것은 웬일일까? 계절 탓인가? 아님 g를 만나 들뜬 기분이 만든 감정의 소용돌이는 아닌지. g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는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나의 안에 잠재한 외로움 때문은 아닌지.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모든 것은 진실을 전해온다.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고 아는 만큼 서로를 위한다면 훨씬 더 가까워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오후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g와의 만남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인연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같은 곳을 바라보며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뜻밖의 데이트에서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 것만 같은 따뜻한 감정이 꿈틀대며 내 몸을 휘감는다. 오늘 밤은 깊어가는 가을 풍경 속으로 소소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따뜻한 행복을 살포시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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