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만년필, 볼펜
훌륭한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거야 훌륭한 목수 이야기일 뿐이고, 범인들에게는 훌륭한 연장이 아무래도 그나마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조건 정도는 될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부지런하게 글을 쓰는 편도 아니면서 필기구에 욕심이 많다. 오늘은 그냥 이런저런 필기도구 이야기.
아날로그 감성 지극한 관점에서 만년필만큼 필기 욕구를 자극하는 물건이 또 있나 싶다. 나는 연필의 사각거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연필로 쓰고 지우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년필이 주는 촉각적 자극은 묘한 에로티즘이 있다. 점점 줄어드는 잉크, 미처 정리되지 못한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 제대로 된 문장 하나 구성하지 못하면서 만년필의 잉크는 점점 메말라간다.... 는 극적인 압박은 대개 비극적으로 끝난다. 미완성. 사각사각 종이를 미세하게 긁는 펜촉은 쓸데없는 문장들과 만나면서 조금씩 구겨지고 뒤틀린다. 펜촉의 고통이 ‘사각사각’ 울릴 때쯤, 내가 하는 이 비생산적인 일들의 ‘무용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주로 펠리컨 M200 만년필을 사용한다. 사실 별 선택의 여지도 없었는데, 사실 이 가격대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다. 워터맨의 헤미스피어도 매력적이지만 지나치게 얇은 몸통은 손에 꼭 맞지를 않는다. 상당히 넉넉한 잉크 저장량과 가벼운 무게는 손에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에, 종이와 잉크를 낭비하기에 부담이 적다. (당연히 죄책감도 적다) 그와 함께 사용하는 만년필은 라미의 알스타 만년필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라미의 만년필은 사파리인데, 알스타나 사파리나 펜촉은 같기 때문에 별 차이는 없다. 다만 알스타의 몸통이 조금 더 알루미늄의 느낌이 있어서 조금 묵직하다. 라미의 펜촉은 가성비의 펜촉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써보면 미끄러짐과 사각거림의 묘한 균형감이 느껴지는데, 만년필의 필기감과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이 두 펜으로 상당히 많은 종이를 낭비했다. 그러다가 조금 메모와 글쓰기에 시들해졌다.
볼펜은 라미의 사파리 볼펜을 주로 사용한다. 주로 업무용이나 사무용으로 가볍게 들고 쓸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급하게 대강 지시사항과 협의 사항을 기록하는 데 만년필은 좀 무거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년필이 주는 그 에로틱한 글쓰기의 긴장감을 사무용으로 뺏기고 싶지 않았다. 만년필의 독특한 필기감은 바로 내 필기 습관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일’에 나의 정체성을 갈아 넣고 싶지는 않았다. 써놓고 보니 나의 글쓰기 정체성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낯간지러운 표현인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
올해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의외로 아이패드가 수업을 만드는 데 꽤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타 간단한 동영상을 제작하는 것 역시 꽤 유용한 도구였다. 엔터테인먼트 기기로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는 데도 적합했지만, E BOOK(전자책)을 보는 데도 꽤 유용했다. 전자책을 보면서 곧바로 노션이나 트렐로, 어썸노트에 메모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일일이 손으로 적는 ‘감성’을 ‘라떼는 말이야~’로 추락시킬만한 충격이었다. 여전히 만년필의 필기 쾌감은 높았지만, 전자책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키보드와 마우스가 없는 전자책은 굉장히 불편했다. 이 즈음 내 손에 블루투스 키보드가 뚝 떨어졌다. 로지텍의 k380은 흥미로운 타건감과 간편한 휴대성 덕분에 구입한 지 하루 만에 모든 필기구를 밀어냈다. (물론 나는 꼰대라서 ‘라떼는 말이야~만년필의 감성으로 말이야~~’를 다시 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꾹 누르면 툭하고 손가락 끝을 튕겨내는 키들은 밀당의 정석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통통 튀어 오르는 키는, 사무실의 노트북에서 만나던 타건감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줬다. 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나는 잉크와 펜촉과 종이에 대한 죄책감을 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글쓰기와 나 사이의 긴장감이 덜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디지털 시대의 필기라는 새로운 긴장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도 같았다.
어쨌든 도구를 갖추었다. 나의 도구들은 대부분 엔트리급(입문용)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입문한 것 같은 기분은 기묘한 소속감과 자괴감,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자감의 세계로 이끈다. 나는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그리고 어쩌면 글 쓰는 사람들의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얼치기 작가의 네이밍을 달 지도 모를 일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그 모든 것들을 뒤얽어 부푼 꿈의 세계로 입문시켜주는 나의 필기구들.
오늘은 그런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