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룩업, 전라디언의 굴레, 기억하는 소설.. 그리고 아이유
새해가 밝아왔고 나는 희망도 없이 코로나 검사를 받은 채 집에 콕 박혀 있는 중이다. 감기 기운 하나로 용기까지 내가며 선별 진료소에서 뭔가 죄를 고백하는 기분으로 검사를 받고 나왔다. 고해소에 들어가는 사람 마냥 차분히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마음으로 줄을 서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듯 고개를 들어 내 콧구멍을 들고. 죄사함을 받듯 코에 그 긴 면봉을 깊숙이 후벼 내 죄에 대해 생각하고. 돌아 나오면서 그래도 뭔가 깨끗해진(?) 마음 가짐으로 집으로 향했다.
감금 상태로 집에 있다 보니 반 강제로 휴식이다.
보속 하는 마음으로 글을 오랜만에 한 편 써야지 싶다.
2021년의 마지막과 2022년의 시작. 나는 책을 읽었고, 영화를 봤고, 음악을 들었다. 화제의 책 <전라디언의 굴레>를 읽었고, <돈룩업>을 봤고, 아이유의 <조각집>을 들었다.
나는 전라북도 출생이고 거기서 대학까지 보냈다. 그리고 그 지역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직간접적으로 느끼며 자라온 40대 중후반의 사내다. 그러다 보니 전라도 혐오에 대해 민감한 편이며 그 지역에 대한 애정 역시 매우 강하다. 이 지역에 대한 혐오의 언어인 '전라디언'은 무언가를 배제하고, 낙인찍는 효과를 준다. 공론장에서 전라디언이라는 용어가 논의된 적은 없었다. 지역 차별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는 강준만 교수가 90년대에 어느 정도 진행했었다. 그러나 전라도에 대한 혐오 앞에서 지역 정치 경제에 관한 논의는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그 결과가 이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라도 지역의 낙후성이다.
저자는 예민하고 영리하게 책의 시작을 '후각'적 감각으로 풀어냈다. 전라도에 들어서면 나는 그 기묘한 악취. 그것은 닭 사육장의 냄새라는 점과 그것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전라도가 어느 자리에 위치해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같은 경제적 조건이 결국엔 지역 엘리트의 부재와 지역 정치의 중앙 예속화, 거버넌스 체제의 붕괴로 인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정도로 타락했음을 알린다.
나는 저자가 분석한 문제의식에는 매우 동의하지만, 그가 내세운 해결책에는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이미 붕괴된 지역 정치 체제에 새로움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의 청년들은 어떻게든 지역을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고, 지역 유지들로 이루어진 기존 카르텔은 여전히 공고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두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오로지 과거의 영광과 정신적 유산만을 여전히 받들고 있다. 종말이 눈앞인데도 말이다.
<돈룩업>은 바로 그 종말에 대해 말하는 영화였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는 설정 안에 미국의 정치적 지형과 뿌리 깊은 모순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꼬는 블랙코미디다. 문제는 이 체제가 민주주의가 만들어 놓은 부작용이라는 거다. 오늘날 미국이 반지성주의라는 문화적 토양 아래서 성장한 것은 꽤 많은 사람들이 증언했다.(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이름을 불러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이 책을 모리모토 안리가 요약한 <반지성주의>도 나는 흥미롭게 잘 읽었다. 요약이라고만 말하면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할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방대한 주장을 매우 핵심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 이야기를 살짝 꺼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반지성주의의 문화적 토양이 비단 미국뿐인가. 우리는 어떤가? 반지성주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들을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반지성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에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있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선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민주주의가 '선의의 다수'의견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당'의 관행이 시혜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정당은 정치적 이익이라는 부분을 최대한 고려하되, 그간 정당 간 합의를 통해 서로 양보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방식으로 상생의 정치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관행을 깡그리 무시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선동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거의 완벽하게 작살냈다. 이런 맥락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통해 스티븐 래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주장한 내용이다. 의회의 권한을 최대한 약화시키고 대통령 권한을 집중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치지형이 짜이는 것은 선동가들에게 최고의 조건이다.
어쨌든 반지성주의 또한 민주주의의 한 영역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에 대해 스스로 경고를 보내지 않으면 종말은 의외로 간단하게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정치에 어떤 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코로나 시대를 돌아볼 가까운 미래에는 과학이 정치에 휘둘리고 정치 또한 갈피를 못 잡는 이 시대에 대한 매몰찬 비판이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는 한낱 핑계에 불과하고 그저 '표장사'를 하는 정치인들의 시대에서 '오징어게임'의 인기가 국제적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타락은 반드시 과학의 몰락과 찾아올 것이다. 다시 말해 전문가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정치적 지형과 상관없이 매서운 칼날을 쥔 인텔리겐차로서의 모습을 잃는 순간 민주주의의 몰락은 쉽게 찾아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돈룩업'이다. 이 영화는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처럼 보이지만, 민디 박사의 타락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부정하는 존재고, 부정의 전망을 통해 긍정의 전망을 끌어내야 하는 존재다. 행정관료란 결국 그 부정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전문가는 부정보다는 매스미디어를 택한다.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는 전문가라니, 나는 이 영화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한때 희대의 섹시스타였던) 중년의 천문학자 민디의 타락과 양심에 따른 복원이 가장 치열한 비판으로 보였다. 그의 뒤늦은 참회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무 소용도 없다. 그저 진실을 보라고 연설하는 것 말고 말이다.
주어진 현상에 대해 합의조차 못하는 정치 시스템에 대한 맹렬한 비판은 자칫 공허한 소리처럼도 들릴 수 있겠다 싶었다. 결국 합의 앞에 필요한 것은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냉철한 현실 자각이고, 이를 방해하는 것은 정치 지형에 따른 이데올로기다. 우리는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전라도는 줄곧 중앙 정치에 요구해왔다. 그동안의 차별에 대해 보상하라. 그 보상의 방향과 방법은 soc 였고, 이는 꼬리칸의 탑승객을 위한 선물이 아니었다. 토건은 결국 지역의 유지들과 지방 토호세력에 의해 완전 점유되었고, 지역민들은 이데올로기만 가졌다. 그러나 거기서 미래는 없다. 우울한 전망들에 대해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이제 우리의 해결책에는 상수가 하나 추가된 셈이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필사적인 대중 선동. 그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과학적인 분석과 정책. 이게 가능할까?
나는 2021년 창비교육과 이 소설 선집 시리즈의 마지막 기획으로 <기억하는 소설>을 그동안 함께 뜻을 같이 해왔던 선생님들과 펴냈다. 그 선집의 마지막 소설은 공교롭게도 우주에서 날아오는 돌멩이가 지구를 멸망시키기 직전의 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돌멩이는 곧 지구로 직격 할 텐데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카드값을 걱정하고 거기에 매여있다. 그리고 지구의 절멸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끊임없이 우주의 가혹함에 대해 묻는다.
네가 말을 해 줘서 우주에 위아래가 없고 공기도 없고 아주 춥고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내가 영화처럼 이해를 했어. 근데 이해를 하면 또 이해가 안 되는 게 생긴다. 우선 우주한테는 네가 미세 먼지인지 몰라도 나한테는 네가 미세 먼지가 아니야. 나도 미세 먼지가 아니다. 그리고 너나 나나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고 분명히 있어. 또 네 말처럼 우리가 아무리 미세 먼지 같은 그런 존재라고 해도 나는 우리가 사라지는 게 아쉽고 슬프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엄마 가까운 곳으로 얼마 가지 못하더라도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린 이미 충분히 가까이 있다고, 우주는 무한하나 시작과 끝이 있기에 언젠가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우린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우주가 생기고 없어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해도 우린 영영 같이 있을 거라고 꼭 말해 줄 것이다.
글쎄... 이 정도로 위로가 될 지는 모르겠다.
조각집은 슬픈 노래들로 가득하다. 어쩌면 이렇게 매정할 정도로 슬픈가.... 종말을 앞 두고 듣는 아이유의 노래들은 하나같이 처연하고 돌아올 수 없는 어떤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가득하다. 정말 존재했던 공간일까? 정말 존재했던 사람이었을까? 아득하고 까마득한 기억은 자꾸 과거 저편을 소환하지만, 우리는 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어떤 것들에 대한 것 말이다.
2021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의 우리는 그 시절에 가만히 두어야 한다. 우리의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2021년에 나는 거기 있었고, 우리도 거기 있었다. 우리가 생존할 내일에 2021년이 어떤 질문을 던졌을 거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시간에 가봐야 알 것이다.
나는 여전히 어디선가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볼 거다. 그리고 내가 누구였는지 묻는 과거의 나에게 끊임없이 대답할 거다.
진짜 고백성사는 그 순간에 이뤄진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