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 독자 May 22. 2024

아버지의 숙직실

쿠스코? 쿠스코!

  남미 여행에 대한 나의 동경은 아버지의 숙직실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유소년기를 보낸 우리 가족의 집은 아버지가 일하시는 연구원의 관사였다. 관사는 아버지가 일하시는 사무실과 가까웠기에 아버지는 종종 일이 생긴 동료의 숙직을 대신해주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나와 동생은 아버지의 숙직실에 들렀다. 옷가지를 챙겨 가져다 드리기도 하고, 저녁에 드실 간식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날도 물건들을 가져다 드리러 숙직실에 들린 날이었다. 그때 그걸 본 거다.


  그 당시 유년기를 보낸 이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일요일 아침은 무조건 <디즈니 만화동산> 시청으로 시작! 그렇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만나는 <디즈니 만화동산> 속 세상은 놀라웠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영상미는 또 어찌나 뛰어난지. 지금이야 볼 것들이 넘쳐나서 문제지만 당시엔 방송사에서 편성하는 프로그램을 시간에 꼭 맞춰 보는 게 다였다. 그렇게 아이들 모두가 같은 채널을 보며 공통적인 문화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내가 본 것을 내 친구도 보고 왔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대 정서.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공통된 즐거움을 느끼던 시절.


  지금은 개개인의 취향에 맞춰 원하는 것들을 이것저것 골라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모두가 다른 정서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비해 라떼~의 그 시절은 모두가 일요일 아침이면 <디즈니 만화동산>을 만나는 공통된 경험을 공유하는 시대였다.


  우리가 <디즈니 만화동산>에서 느끼는 기쁨을 아시는 아버지는 티브이 시청에도 관대하셨다. 새로 나온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이 보이면 비디오를 빌려 제일 먼저 보여주시기도 했다. 그날도 그랬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동생과 함께 숙직실에 갔던 날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그날은 집이 아닌 숙직실에서 새로 빌린 애니메이션 비디오 한 편을 틀어주셨다. 제목이 <쿠스코? 쿠스코!>


  '쿠스코'라는 이름의 황금 왕관을 쓴 황제, 산꼭대기에 지어진 하늘과 가까운 성, 이국적인 생김새의 특이한 동물 라마. 이게 바로 내가 처음 만난 남미의 문화였다. 그렇게 <쿠스코? 쿠스코!>라는 비디오 한 편으로 몰랐던 세계 저 편의 세상을 만났다. 자라면서 그게 고대 제국 잉카의 문명이라는 사실과 콜럼버스가 남미 대륙을 밟기 전엔 그곳이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숙직실에서 나의 동경이 시작된 거다. 나아가 청소년기에는 대항해시대를 그려낸 작품들이 나를 매료했다. 신대륙. 애니메이션 <쿠스코 쿠스코> 속의 문명이 있는 그곳이었다. 그렇게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곳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흔적뿐인 과거 문명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까지도.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나의 오랜 그리움을 마주하러 가는 길이다. 몇 시간 전까지 원 없이 비를 쏟아낸 하늘의 미련 아래 아직은 차가운 한기가 느껴진다. 해가 뜨기 전 새벽의 습한 공기는 온몸을 휘감았다. 그 모두를 기꺼이 안고 땅을 디디며 늙은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차분한 걸음들. 그 광경을 보는 고요한 내 마음을 요란하게 두드리던 새벽 라디오 속 생경한 페루의 음악 소리까지. 지금 나는 마추픽추로 가는 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차밤바에서의 사흘이 지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