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사회 천태만상
세 번 만이다.
브런치 작가 도전에 성공한 것이..
회사를 그만두고 평생 글 쓰면서 살아야지 결심한 후에 가장 먼저 검색해 본 것이 '브런치 작가 되기'였다.
브런치 작가가 되기로 도전하고 진행했다가 쓴 맛 본 경험들, 그러다가 드디어 신청이 수락되고 지금은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야기들.
개개인마다의 다양한 사정 속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도전 횟수.
단박에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세 번, 다섯 번 만에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난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할까? 통상 열 번까지 도전하는 것 같진 않으니
나는 최대 8번까지는 해보자. 왜 8이냐면 7전 8기라는 말이 있으니까
첫 번째 도전. 그때는 뭐랄까?...... 일단 한번 던져 보는 느낌
브런치 작가를 선별한다는 브런치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맛만 보자 하는 정도
그래도 나름 일주일 내내 새벽시간을 이용해서 부지런히 글을 썼다.
우습게도 몇 번의 퇴고를 거친 후 글을 읽어보니 꽤 괜찮은 느낌이다.
작가 지원을 한 후 3일 만인가? 실패했다는 분들의 글에서 읽어본 문구를 실제 내 메일에서 확인한다.
음, 그래 뭐 큰 기대를 안 했던 거니까.
두 번째 도전은 좀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첫 번째 도전 때 심사 대상인 글을 다시 읽어보니 뭔가 좀 밋밋한 것이 뒷심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주제에 대해 좀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할 것 같은 느낌.
두 번째 도전
첫 번째 도전 때 부족한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보완하여 심사를 의뢰했다.
실패
이때의 기분은 뭐랄까? 좀 실망했다. 나름 실패의 원인 분석 후 정성 들여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실패라니
작가 소개가 너무 건방졌나? 뽑아줄 때까지 계속 신청할 거라는 말이 그렇게 들렸을까?
기대를 많이 한만큼 하루에도 세 번, 네 번 결과를 확인하고 몸이 아주 안달이 났다.
약간 힘이 빠지기도 했고, 그 후에 제주도로 일주일간 휴가를 가기도 했고
첫 번째, 두 번째 브런치 작가 도전을 일주일 간격으로 한 것에 비하면 세 번째 도전 때는 좀 늘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 좀 마음이 비워진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실패 후 2주 후에 세 번째 도전을 했다.
좀 더 마음을 비우고 남에게 날 어떻게 보이겠다는 마음 없이 그냥 썼고, 그냥 냈다.
그러니까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신청서를 낸 것이 아니라
그냥 글을 썼고, 브런치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수시로 확인하지 않았다.
합격
세 번째 도전 후 합격 메시지를 보았을 때의 느낌은 담담함.
황당하게 자격도 없는 나에게 이런 영광을 주다니 하는 격한 고마움 같은 것은 없었다.
살다 보면 이런 경험을 꽤 자주 경험한다.
죽어라 할 때는 안되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다 보면 언젠가 되겠지 포기하고 있을 때쯤 날아오는 희소식
나에게 공무원 시험 경험도 그런 것이었다. 세 번의 도전 후에 합격한 것도 이번 브런치 작가로 데뷔하기 위해 도전한 횟수와 같다. 물론 그 두 가지를 같은 저울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쉽게 표현하자면 브런치 작가 도전은 공무원 시험 도전의 미니어처 같은 느낌이다.
지금은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고 있지만 그건 공직사회가 내 기대에 못 미쳐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조직생활이 잘 맞지 않아서다. 아직은 이 나라에서 직원의 복지와 관련해서 가장 선진적인 제도를 가장 빨리 도입하고 실천하는, 그래서 일반기업의 선례가 되고 일종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이곳은 공직사회이다.
그 공직사회에 들어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나에게 세상은 오직 학원과 도서관, 집뿐이었고 온통 공무원 시험 합격에 인생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그렇게 2년 8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합격했다.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지 벌써 15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뉴스에 공무원 시험 응시율이나
가끔 여전히 살벌한 노량진, 신림동 학원가에 대한 기사를 보면 그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나의 공시생 시절 2년 8개월, 3번의 도전이 각각 어떤 마음가짐이었고, 어떤 방식으로 공부했는지 얘기해보겠다.
그러면 아직 공시생 신분으로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종로에서 공시생을 시작했다. 일단 한번 해보자 하는 정말 가벼운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학원비가 비쌌고 대학교 강의실보다 더 넓은 듯한 강의실에서 수험생들이 바글바글거렸다.
나는 나름 비장한 각오로 시작했기에 항상 강의실 제일 앞에 앉아서 정말 부지런히 들었다.
그때는.. 뭐랄까?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만 그득한
노련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똘망똘망한 대학원생 같은 느낌이었다.
종로만 해도 노량진과 달리 공시생이라기보다는 공시생과 백수의 중간적인 마음가짐의 사람들이 꽤나 있었고, 오랜만에 시작한 수험생활의 외로움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려는 마음이 가득 느껴졌다.
이게 공부를 하는 건지 비슷한 처지의 또래와 노는 건지 모르겠고
가까운 종로거리나 피맛골도 가끔 돌아다니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2001년 9월 첫 시험을 정신없이 치르고 그 해 11월 결과 별표. 탈락
당연한 결과, 죽자살자 해도 될까 말까 하는 판국에
일단 한번 해보자. 어떤 건지 한번 보기나 해보자 이런 마음이었으니 될 리가 없지
대체로 첫 번째 시험 후에 이게 아니구나 싶어 수험생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다.
나는 노량진으로 옮겼다. 그곳은 종로와 차원이 달랐다.
강의실, 책상, 의자 등 물리적인 여건도 훨씬 더 열악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의식할 뿐, 전혀 마음을 나누지 않았다.
좀비처럼 책 아니면 땅만 쳐다보면서 어떤 관심거리도 억지로 차단하고 있었다.
삭막한 마음이며 공부에 대한 애증과 악착을 떠는 모습까지
점점 나도 노량진 수험생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2년 차만 해도, 1년 내내 공부만 한다는 것은 내겐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난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당시 2002년 월드컵이 있었고 나라 전체가 월드컵으로 들썩이고 있던 터라 그 분위기는 2년 차인 나를 바로 강타했다. 나도 8강, 4강 같은 중요한 경기는 빨간 티셔츠 입고 강남 카페에서 친구와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으니 될 리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해 9월 두 번째 시험, 11월 두 번째 탈락
두 번째 도전 때는 '혹시? 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가만히 지난 1년을 돌이켜보니 새록새록 후회되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인데- 내 방 하나 가득 쌓여있는 책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뭔가 아쉬워서, 좀 더 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때, 그때,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2%의 후회와 반성. 딱 2%
그렇게 딱 2% 부족한 성적으로 나는 또 떨어진다.
이제 20대의 마지막 시험이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30대라는 것이
-막상 가보니 뭐 그리 크게 다를 것도 없던데-되면 너무 늙은 거 아닐까?
서른이 되면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나마 20대일 때 결혼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볼까?
그런 고민을 한두 달 한 것 같고,
아빠의 격려에 힘입어 마지막 도전을 결심하고 필사적으로 수험에 돌입한다.
특별히 더 강의를 들을 것도 없었기에 최대한 자습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도서관 죽돌이가 된다.
내가 당시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힘의 강약 조절이었고, D-day를 목표로 시간과 체력 안배를 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 도서관에 가장 먼저 들어가 도서관을 환기하고, 도서관 마감한다는 방송을 다 들은 후 집에 왔다.
항상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 와서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항상 같은 시간에 매점에서 밥을 먹고 항상 도서관 마치는 시간까지 공부했다.
명절에도 공부하고 시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치른 서울시 7급 시험을 치른 직 후에도 도서관에 갔다.
마지막 스퍼트를 다하기 위해 9월 시험이 있기 100일 전에 한약을 한 달 동안 먹었고
마지막까지 쉼 없이 공부했고, 시험지 배부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노트필기를 스크린하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집중해서 시험을 치렀다.
그렇게 끝냈다.
시험이 끝난 그다음 날 내방 한가득 쌓여있던 책을 모두 버렸다.
이젠 더 할 수 없다. 이번에도 안되면 안 되는 거다. 작년에 느꼈던 2%의 후회와 반성도 없었다.
난 후회가 없었다. 난 내 깜냥에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다했다.
그래도 안되면, 나는 공무원이 될 수 없는 거다.
그리고 며칠 후 내 베프와 함께 떠났던 경주여행을 잊을 수가 없다.
2004년 2월 23일 나는 국가직 7급 공무원에 임용되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도전의 선명한 차이는
단 0.2%라도 후회가 느껴지는가와 아닌가?
책을 버리는 게 망설여지는가와 아닌가? 명확하게 두 가지였다.
세 번째 시험을 치른 후엔 떨어지면 빨리 취직하리라 결심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해보았던 가장 최선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후회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나도 한 번쯤 공부 좀 해봤노라
말할 수 있는 경험을 쌓았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공무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공무원 경력 15년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시간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나를 압도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얻은 자리가 언제부터인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무원이 되기 위해 긴 시간 공부한 것도
그간 공무원 조직의 일원으로 일한 것도
중간에 한번 부처를 옮겨서 새로운 업무와 환경을 익힌 것도
어느 것 하나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원래 후회를 잘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리고 또 사표 쓰고 민간인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다.
어떤 결정을 하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나는 후회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