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예상 밖의 장소에서 과거 지인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지인'은 당시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히 친했을 수도 있다.
학교 다닐 때 꽤 친했던 사람, 교회 다닐 때 꽤 친했던 사람
번호는 있어도 거의 연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연락처가 없는 경우도 있다. 전화번호가 있고 없음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는 아니다.
최근에 새로 생긴 어린이 전용 수영장을 둘러보기 위해 잠깐 들렀던 적이 있다.
수영 강습이 끝난 시각인지 아이들은 없고 대기실에 부모들만 있었다.
전반적인 분위기를 한번 쓰윽 스캔하는데 순간 낯익은 옆모습을 발견한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순식간에 떠올랐다. 둘째 출산하고 같은 조리원에서 있던 사람
그게 벌써 6년 전이니 조금 변한 듯 하지만 거의 그대로다. 아주 잠깐 고민한다. 이때 아주 잠깐의 고민은 앞으로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좌우할 수도 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린다. '톡톡'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 기억하는 눈치다.
"맞지?"
모든 기억이 떠오른다. 둘째 낳고 조리원에서 다들 퉁퉁 부은 모습으로 수유실에서 담소했었다. 모두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친해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소위 '조리원 친구'라 불리는 사람들은 조리원을 나온 후에도 아이가 돌 즈음까지는 외부에서 단체로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맞는 사람, 가까이 사는 사람, 아이들이 특히 친한 사람들끼리 관계가 재편성된다.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한 순간부터 나는 겉으로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전화번호를 받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많이 당한(?) 것처럼 의욕적으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연락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리원의 그녀도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아이들이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나오고 이제 가야할 시간이다. 슬쩍 나를 보던 그녀는 '연락을... 하하 다음에 또 봐요'한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고민만 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내게 연락처를 물어보려 했으나 내가 거절한 셈이다.
우연히 만난 과거 지인들이 헤어질 무렵 '번호가 어떻게 돼?" 바로 번호를 누른 후에 "그 번호가 내 거야"하는 경우를 몇 번 경험했다.
나는 저장한다. 그렇게 핸드폰에 저장된 개인정보가 늘어난다.
예상했듯이 연락은 없다. 나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어차피 연락을 하기 위해 내게 전화번호를 물은 게 아니다. 우연히 만나고 헤어지기 직전에 하는 행동일 뿐이다.
핸드폰에 연락처가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씩 싹 정리를 한다. 설마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 한번 안 한 사람한테 갑자기 연락할 일이 있겠어? 하면서
옷장에 옷도 2년 동안 입지 않으면 앞으로도 입지 않으니 정리하라고들 한다.
그렇게 내 연락처의 번호들은 입지 않는 옷 취급을 당하며 몇 년에 한 번씩 정리당한다.
그래서 애초에 물건 살 때 잘 생각해서 사야 하듯, 사람의 연락처를 물을 때도 신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녀의 연락처가 안 입는 옷이 될까 봐.
전화번호만 받고 연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서로 그 상황을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장 적절한 행동방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개인정보를 손에 쥐고 -그것도 과거에 꽤 친했던-연락을 하지 않는 것은 그녀를 속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한동안 기다릴거다. ' 이 사람이 연락을 할까?
나는 번호를 받지 않는 게 좋겠다고 은연중에 암시했다.
괜히 서로에게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이해했을 거다.
어른이 되어 사적으로 만난 사람은 차마 떼어 낼 수도 없고 골치 아픈 관계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8개의 좋은 관계보다 2개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한 기억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기가 더 어려워진다.
아주 친한 척 내게 다가와 재미있는 사진들도 보여주며 웃음을 주었던 또 다른 그녀는 물건을 팔기 위해 내게 접근해서 잊을만하면 관리하는 듯한 문자를 보내서 기운 빼곤 했다.
그래도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려고 했던 조리원 그녀에게 조금 미안하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연락처를 받지 않기로 했다. 어른이 되어 점점 친구를 만들기 어려운 건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충분히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좋은 친구가 되겠구나 확신이 들지 않으면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을 거다. 그게 서로에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