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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용 May 25. 2022

삶의 태도에 대하여
_"피론주의 개요"를 읽고

생각일기 2 - 인생의 진리




책을 읽은 이유


작년 이맘때쯤에 읽은 책은 나에게 크나큰 숙제를 안겨줬다. 그 책의 이름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저자: 채사장)"이었다. 잘 살고 있던 나에게 '삶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같은 심오하고 거대한 질문을 턱 하고 얹어놨다. 덕분에 나의 사고 영역이 한층 아니 두층 확장된 느낌을 받았었다. 책 "피론주의 개요"는 그 이후 나와 세상, 가치관 같은 심오한 질문에 나 스스로 대답하기 위해 읽은 책 중 하나이다.


작품 "피론" (화가: Petrarcameister)




책 소개


책 "피론주의 개요"의 저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피론주의 학파의 일원으로서 피론주의를 옹호하며 스토아학파 등 다른 독단주의 학파들을 비판한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스토아학파: 이 책에 따르면 스토아학파의 사상은 "객관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살아간다"로 정리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 내에서도 철학자마다 관점이 달라서 논쟁이 많다.
피론주의 학파: 이 책에 따르면 피론주의 학파의 사상은 "객관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을 알 수 없으므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로 정리할 수 있다. 피론주의는 회의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피론'은 회의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가이다.


이 책은 원래 총 3권으로 구성된다. 1권(챕터 1)에서는 피론주의 학파가 주장하는 “판단 유보”에 관한 내용을 정리 및 논증한다. 2권과 3권에서는 대표적으로 스토아학파의 논리를 위 전제에 나온 차이점을 토대로 논파한다. 이 글에서는 챕터 1에 나오는 "판단 유보"가 무엇인지, 그 논증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알아보자.


"피론주의 개요" 표지




책 내용_판단 유보


 피론주의 학파는 우리는 절대 기준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히는 우리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표상이 각기 다르기에 모두가 인정할만한 객관적 가치를 개개인이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알고 느끼는 것과 다른 사람이 알고 느끼는 것이 다른데, 어떻게 내가 모든 상황과 조건을 아우르는 판단을 내릴 수 있냐는 말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0가지 논증을 소개한다. 각 개체(사람, 동물 등)가 감각할 수 있는 표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전제된 상황과 조건이 다르고, 문화마다 도덕과 통념의 차이점 등이 있는 등의 논증이 있다. 10가지 모든 논증은 개체 간의 상대성으로 귀결된다.


 이해를 위해 위의 논증들을 예시들을 통해서 설명해보겠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오감에 의해 인지된다. 우리는 보고, 느끼고, 냄새를 맡고, 만지며, 듣는다. 하지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누구는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도 칠판의 글씨가 잘 보이지만 난 그렇지 않다. 신호등의 색깔은 세 가지이지만 색맹의 경우 인식하지 못한다. 개나 상어는 우리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냄새도 잘 맡는다. 토끼도 우리보다 훨씬 멀리 나는 소리를 듣는다.


개는 사람보다 발 냄새를 잘 맡는다


 이렇듯 사람들은 모두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지만, 각각 머릿속으로 받아들이는 모양(표상)은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 간에 이런 표상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즉 가치관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누구는 냄새에 민감해서 공사장을 싫어하지만, 오히려 페인트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힙합 음악을 좋아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샤워를 통해 상쾌함을 느끼지만, 고양이는 샤워를 싫어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떠올린 뉴턴은 사고방식이 다르다


  결국 모두가 각자의 표상과 가치관에 의존해서 판단을 내리게 되어있다. 그리고 모두의 표상과 가치관은 조금씩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가 심판자처럼 "이것이 절대적 진리이다!"라고 말해도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는 게 저자가 말하는 피론주의의 논리이다. 




나의 생각


 나는 어떤 학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까? 이에 대답하기에 앞서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가치관을 정리하는 것이 좋을 거 같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섞어 쓰고 있었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분야별로 나의 철학 기틀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인생의 진리"에 관해서 나는 피론주의적(과학적) 태도를 취한다. 객관적인 삶의 진리를 심판자의 입장에서 정의 내릴 수는 없어도, 나의 가치관과 표상에 따른 개인적 진리를 만들어나가며 주장할 것이다.


 반면 "일(창업이나 토론과 같은 지식적 충돌)"에서 나는 스토아적(기업가 정신적) 주장을 할 것이다. 지식은 충돌을 통해 논증 또는 논파당하고, 주장은 토론을 통해 자연선택(세대적 흐름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타인에게 의존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특히 창업이나 지식적 충돌(토론)에서는 나의 주장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나는 올곧고 확신하는 태도로 일에 임할 것이다. 다만 그래도 나의 주장이 논파당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논파당한다면 근거를 보완하거나, 아예 설득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둘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 나는 강한 주장을 갖는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어떤 학파의 주장을 더 중심적으로 생각하냐의 차이이지 항상 둘 모두를 고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양자 역학처럼, 나의 생각도 확률적으로 어떤 것이 더 우세하냐의 차이이지 완벽한 판단 기준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근본적인 생각 기준인 것 같다. 앞으로 나의 가치관을 더 철옹성처럼 다지면서 근거를 정립해나가야겠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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