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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May 25. 2020

매일 같은 길을 걷다보면

재택근무 점심시간 산책 기록


전례 없는 바이러스 사태로 난생 처음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었던 3월부터 4월까지 두 달을 집에서 일하며 보냈고, 실로 오랜만에 출근을 했으나 사무실 근처에 확진자가 쏟아지며 다시 재택근무중이다. 재택근무를 하며 가장 값진 수확은, 점심시간 산책이다. 강남 한복판에서 일하는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란, 쏜살같이 밥을 먹고 겨우 짬을 내야 사무실 근처 한바퀴를 산책할 수 있는 시간. 그나마도 사무실 근처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사실 '인도'가 아니라 '도로'로 표기되어 있어서 행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차를 피해 좁은 길 한 편으로 걸어가노라면 근처 사무실과 병원, 학원, 상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또 피해다녀야 한다. 피해가는 그 길에는 또 마구잡이로 버려진 쓰레기들이 있고, 하루가 멀다하고 건물과 상점이 바뀌며 쏟아지는 공사 소음도 있다. 많은 회사를 다녀봤지만 이번 회사는 다른 건 다 좋은데 사무실 주변 환경이 정말 좋지 않아 슬프다. 다행히 사무실 근처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는 길이 언덕이라 동료들과 함께 할 때면 선뜻 가자고 나서는 이가 없다. 


조용히 혼자 하는 산책을 즐기는 나로서는, 재택근무로 혼자 점심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 너무도 반가웠다. 재택근무를 하게 된 원인은 분명 기뻐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말이다.  


점심을 간단히 먹거나 거르고 동네 공원으로 향한다. 이사 온 동네는 신도시로 평일은 정말 조용하고 한산하다. 게다가 집 주변에는 사방이 공원이고, 공원들이 산과 호수 근처여서 경치도 좋다. 서울은 작은 놀이터에 벤치만 있어도 '공원'이라고 했는데 경기도는 스케일이 남다르다ㅎㅎ 처음 제대로 산책을 했을 때는 뒷산에 '중앙공원' 표지판을 보고 걸어갔는데 아무리 동산을 올라도 공원 같은 모습이 나오질 않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었다. 주말에 다시 가보니 그 산도 공원이었고 그 산을 넘어가니 넓은 잔디공원이 등장했다. 그 잔디공원도 중앙공원이고, 그 공원을 둘러 싸고 있는 산들이 모두 공원이었다........그 공원은 또 호수공원으로 이어졌다. 평생 서울 한 동네에서만 살다가 이사를 와보니 새삼 느낀다. 경험하는 만큼 생각하게 된다는 걸.

한동안 동네 공원을 한 군데씩 다니면서 점심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는 산책길로 정착했다. 그리고 그 길을 매일 걷다보니 또 색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12시 20분 즈음이면 항상 같은 공원 산책로 길목에서 마주치는 남학생이 있는데, 그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걸어간다. 무얼 듣고 무얼 보며 그리 신나는지 화면만 바라보며 매일 같은 방향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언뜻 보면 성인 남자로 보이지만 표정과 몸짓은 아직 초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남학생.

공원을 산책하고 나서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돌아가는 길이면 늘 조깅을 하는 백인남자가 나를 앞질러 간다. 날이 맑아도 흐려도, 비가 와도 같은 시간에 달려서 그저 그 성실함과 꾸준함에 놀라며.


평일에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근처 사무실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걷기도 하고, 혼자서 빠르게 걷는 사람도 있고 친구들과 수다 떨며 걷거나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있다. 평일에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길래 평일에 산책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그들도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겠지.


비가 오면 산책길에 지렁이가 많이 보인다. 다음날이면 개미들이 열심히 지렁이를 옮기고 있다. 펭귄을 닮은 귀여운 까치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걷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며 소리를 낸다. 호숫가 근처 뭍에 백로가 우아하게 거닐다 멈추면 그림 같은 풍경이 된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은 오리들은 곤히 잠을 잔다. 가마우지는 호수를 천천히 유영하다 폭 잠수를 하는데 한참 기다리면 저쪽 호숫가에서 퐁 하고 나타난다. 늦겨울을 지나 봄을 맞은 공원의 식물들은 어느새 우거져서 휑하던 산책길을 뒤덮고 있다. 오늘은 길 복판에 돌멩이 같은 게 덩그러니 있길래 다가가 보았더니 죽은 참새 새끼였다. 놀라서 호다닥 도망치고 말았는데, 괜히 미안해져서 마음으로나마 기도를 해주었다. 


오가는 길에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마주치면 티는 못 내고 속으로만 한참 앓다가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그러고 나면 점심시간 한시간이 끝난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으면 내게서 따스한 햇볕 냄새와 봄 공기 냄새가 풍긴다. 낮잠 냄새 같은 포근함. 


그동안은 산책길을 사진과 영상으로만 담았두었는데, 역시 글로 옮기니 감정이 더 소복해진다. 걸으며 했던 생각들, 기록해두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혔을 테다. 얼른 사태가 진정되어 재택근무도 끝나야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재택근무하며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번에야 비로소 해보게 됐다.


이전에는 출근할 걱정만 하며 잠들었다면, 요즘은 내일의 산책길을 기대하며 잠든다. 사회적 거리를 두며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을 시간에 집에서 조용히 아침 요가를 하고, 인파와 차량을 피해다니던 점심시간에는 홀로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때와 지금, 같은 일을 하는데도 머리는 좀더 맑아진 느낌이다. 고요함과 자연과 사색이 주는 풍요로움.


클로드 모네, 절벽 위의 산책,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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