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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Jun 27. 2019

맹물처럼 사는 게 이렇게 신명나다니

우울감을 극복하는 법


4월 이후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다.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하지만 올해 봄은 정말 혹독했다. 가족 품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고 두 차례 이직을 거듭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낯선 환경에 여러 번 던졌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힘들어할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나를 방치했다.

내 마음을 돌보지 않았고 남들처럼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고 채찍질만 해댔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아직도 바보 같이 적응도 못한다고 잔인하게 굴었다. 미처 몰랐는데, 그동안 속으로 많이 곪아 있었나 보다. 4월에 그게 터졌고 한 동안은 꽤 힘들었다. 책도 겨우 읽고, 영화는 가벼운 것만 보고 넘겨 버렸고, 무엇보다 글을 쓰지 않았다. 이미 불안함과, 답답함, 죄책감, 그리고 우울감 같은 것들이 내 속에 가득 차 있었고 이외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걸러내는 모든 행동들이 버거웠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정신과 전문의들이 사연을 바탕으로 가볍게 상담을 해주눈 팟캐스트를 찾아 들었다. 소리에 지나치게 민감해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누군가의 사연에, 전문의들은 우울증 증상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자신에 대한 강박감이나 회피성 성향, 대인기피 성향도 우울증이나 우울감에서 발현된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내 속에서 켜켜이 쌓인 채로 곪아서, 나도 모르게 비어져 나왔던 그런 마음이나 행동들이,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증상의 일종이라고,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오히려 병원에 가서 심각한 우울증은 아니라는 진단을 받는 것이 경미한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 집 근처 병원까지 찾아봤지만 선뜻 나서질 못했다. 병원에 가보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급격히 변한 환경도 환경이었지만, 그런 환경 때문에 진정으로 원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문학과 영화, 그리고 글쓰기는 그동안 나를 지탱하는 삶의 원동력이었는데 점점 이 일에 쏟을 시간은 부족해졌다. 직업으로 삼자니 자신이 없고, 직업을 별개로 생각하자니 취미로 즐기기엔 나는 이미 너무 이 일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부족함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나를 몰아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책도, 영화도, 글쓰기도 모두 그만두었다. 읽고 싶은 책만 천천히 읽었고, 영화는 가벼운 장르만 골라봤다.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떤 감상도 글로 절대 옮기지 않았다.



나를 지우니 행복해졌다.

희미해져가는 나를 억지로 붙잡지 않고 보내주고 나니 편안해졌다.



그즈음 십년 지기 친구를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자리까지 나가기도 힘들었지만 뭐랄까, 시도해보고 싶었다. 또 내가 무너질지 그렇지 않을지를. 워낙 무심한 친구라서 막상 내 이야기를 털어 놓고 보니 오히려 더 마음이 편했다. 그가 무심한 줄 알았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남들에게 무심했던 건 오히려 나였을까. 친구는 내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나서 말했다.


- 네가 자신에 대한 기준이 높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오늘 온 친구들 모두. 잘하는 만큼 기준을 높여버리잖아. 그래서 스스로를 더 옥죄는 것 같아.


그 말이 나를 얼마나 평온하게 만들었던가. 4월 13일의 일이다. 친구는, 힘들 때는 만나기는 어려워도 메시지로라도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에게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느꼈다.


나에게 혹독하게 구는 모든 행동들을 내려 놓았다. 우울해서 나쁜 생각이 들면 집안 청소를 했다. 주말에만 가족들을 만나러 가면서 내가 챙겨야만 한다는 부담감도 조금식 덜어냈다. 5월이 왔고, 초여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즈음 나는 맹물처럼 살았다.


하루는 청소를 하면서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데, 한 정신과 전문의가 이런 말을 했다.


- 인턴 시절에 대학병원에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왜 극단적 시도를 해서 병원으로 실려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인가 하고요. 정말 거의 다 젊었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나이인데 그 분들에게는 괴로웠겠죠. 연구 결과도 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면서 우울감이 조금씩 옅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치료하거나 극복하는 분들도 있고요.


걸레질하던 손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바닥을 훔쳤다. 다 지나갈 거야. 괜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겠어, 하면서.


맹물 같은 내가 끔찍하게 싫다가도, 평온한 행복감에 취하면 맹물 같이 사는 것처럼 신명나는 삶이 어디있나 싶다. 잔인한 봄이 다시 올까 봐 걱정은 되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즐기고 싶다. 나를 표현하던 것들을 잠시 지운데도 나의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고, 나를 지탱해주던 것들을 내려 놓는다면 맹물처럼 흐르는 대로 살면 될 일이고, 그도 어려우면 먼지처럼 부유하면 될 일이다.


혹독했던 이십대와 이제서야 제대로 작별인사를 한 기분이다.

이제, 여름이다. 가끔 비는 쏟아지겠지만, 그저 무덥기만 해도 괜찮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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