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요? 쿠마모토요? (3)

쿠마모토 3일차, 울산마치와 만화카레집 - 일본여행의 고온과 저온

by 소란소강


다음날 역시 노면전차 1일권을 사서 다녔다.

이날 맨 처음 간 곳은 쿠마모토 기차역. 역사에 쿠마모토 기념품샵이 많다고 해서 갔는데 쿠마몬 캐릭터상품이 왕창 있었다. 컵 코스터부터, 쿠션, 거울, 동전지갑...여행가면 소품만 왕창 사는 나에게는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기념품 샵에는 스티커사진 기계도 있어서 실로 오랜만에 스티커사진도 찍었다(일본 스티커사진 기계 특유의 과도한 포토샵!).


000001.JPG 쇼핑센터로 돌아와서 제대로 찍은 쿠마모토 성과 노면전차 샷. 쿠마몬과 함께 쿠마모토를 대표하는 명물 둘.
000024.JPG 쿠마모토 역에는 기념품 샵이 많다. 샵마다 '힘내자, 쿠마모토!'라는 현수막이 역시 많았다.


신마치의 작은 책방


쇼핑센터에서 라멘을 먹고, 전날 제대로 못 가본 신마치와 울산마치에 내려서 온동네를 걸어서 다녔다.

신마치는 한적한 동네였고 상점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주말이라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신마치 정류장 바로 건너편에 작은 서점이 영업중이기에 들러보았다. 서점은 1층이었는데 건물이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서 신마치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우리는 서점이 보이면 꼭 들른다. 작은 규모의 책방이었고 책 크기도 대부분 작았다. 대부분 실용서와 만화책이 매대에 놓여있었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한적한 편. 요즘 한국에도 동네서점과 독립출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은 대략 십 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해서, 독립서점이나 출판을 시작하려는 이들은 보통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편이다. 작고 아기자기하면서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와 섬세한 감성이 있는 문화. 여전히 이와 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000011 (2).JPG 쇼핑아케이드 내 라멘집. 쿠마모토 라멘을 팔고 있었다.
000030.JPG 해질녘의 신마치. 오른쪽 건물 1층이 서점이다.
000035.JPG 신마치 역 앞의 서점. 작고 조용하지만 실용서부터 만화책까지 다양했다.
000034.JPG 해질녘 신마치에서 울산마치 가는 길


울산마치, 내가 백 년 전 이 곳에 왔다면


울산마치는 정유재란 때 울산에서 붙잡혀 온 기술자들이 모여 거주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울산마치 근처에 도자기 상점이 언뜻 보였는데, 자기 기술자들이 아니었나 싶었다. 일본 여행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은 결코 편하게만 여행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에 울산에 살았더라면 나도 이곳에 납치되듯 끌려와 강제로 살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작은 동네 산책을 하는 것임에도 여행이 가볍지만은 않다.


대학교 때 동아시아 문화 관련 강의에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읽은 적이 있다. 일본의 이중적인 문화를 다룬 인류학자의 글이다. 고매한 국화를 아낄 줄 알며 예의바르고 겸손하지만 그 뒤에는 칼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의 제목. 신마치와 울산마치를 지나며, 오래전 읽었던 그 책이 떠올랐다.


식당에서 만화책이라니!


다시 쇼핑센터로 돌아와서 일본 카레집을 찾았다. 평소 맛집을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라서 구글맵에서 추천하는 가장 가까운 카레집으로 향했다. 3층에 위치한 카레집은 입구가 굉장히 좁았는데 내부도 그리 넓지는 않았다. 조리대 앞에 바 형태로 된 긴 좌석이 있고 그 뒤로 2인석, 4인석이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 옆에는 남자 고등학생 둘이 앉은 테이블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두 명이 앉은 테이블이 있었다. 내부에는 만화책이 굉장히 많았다. 옆 테이블 남학생들은 한 손에는 만화책을 들고 카레를 먹고 있었다. 만화책을 읽으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가게 내부는 꽤 조용했다. 그 옆 젊은 여자들은 파르페만 각각 시켜서 조용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테이블을 포함해 모든 테이블 위에는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테이블 회전이 중요한 식당에 만화책이 있다는 것, 식당에서 파르페만 시켜도 된다는 것, 그리고 식당에서 흡연이 가능하다는 것. 이 세가지가 나를 놀라게 했고 파르페와 재떨이는 동호회 선배한테 들은 게 있어서 예상한 것이었지만 만화책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카레에 만화책이라니 너무 행복하잖아!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이 외식할 때 가장 고달픈 것은 마주 앉은 사람(특히 둘이라면..)과 대화를 꼭 해야만 하는 분위기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나는 조용히 생각하면서 밥을 먹는 게 좋고, 책을 읽으면서 먹는 편이 더 좋다. 그런 점에서 만화카레집은 ‘취향저격’의 맛집이었다. 게다가 양도 엄청난 크기였다. 일본 식당에 가면 항상 양이 적어서 아쉬웠는데 이 카레집은 그릇은 왜 그리 크고 소스는 왜 그리 많은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었다. 과연 만화책을 보면서 천천히 먹기에 꼭 맞는 양이었다. 아사히 생맥주도 한 잔 마셨는데, 일본산 맥주이기 때문인지 세상에,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는 나인데도 맥주가 맛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_MG_9968.JPG 만화책을 읽으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카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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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적인 여행을 하는 자, 기대를 낮추시게나


흡족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까지 걸었다. 가는 길에 위치한 작은 공원에서 잎이 매우 무성하고 우거진 나무 몇 그루를 봤는데 쿠마모토 새들이 거기에 다 모였는지 새 지저귀는 소리가 사이렌처럼 울리고 있었다. 동호회 선배에게 물어보니 그 나무들에만 새들이 그렇게 몰린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새들만이 알겠지...

호텔 건너편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했는데, 여기서도 실패. 실패할까봐 스타벅스를 갈까했지만, 한번 더 믿어보자는 심정으로 들어간 카페였고, 그 근방에서 꽤 유명한 곳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정말 맹물맛이었다. 결국 커피를 절반이나 남기고 나왔고 편의점에서도 커피를 사보았지만 역시 맛이 없었다...나중에 알고보니 꽤 괜찮은 카페가 많았는데 내가 찾지 못한 것이었다. 발 가는대로 향하는 즉흥적인 여행은 성공하면 무지 기쁘지만 성공할 확률 자체가 낮기 때문에 기대를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새긴 경험이었다.


쿠마모토를 떠나며, 맹물맛 커피야, 안녕!


다음날 드디어 제대로 된 해가 떴다.

쿠마모토 성 근처로 걸어가서 원없이 사진을 찍고 공항으로 향했다. 쿠마모토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쿠마모토 성 보수공사가 끝나면 한번 더 올 일이 생길는지 모르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진한 커피를 마셨다. 내가 알던 익숙한 맛이었다.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진한 커피만큼 쓴 현실로 돌아왔다. 당분간 맹물맛이 나는 커피를 맛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쓴 현실에 치이다 보면, 그 커피가 곧 그리워질 날도 오겠지.


000018.JPG 쿠마모토 성 앞 기념품 샵 거리
000022 (2).JPG 기념품 샵에서 팔던 수박맛 사이다. (네가 제일 그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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