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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Dec 16. 2018

익숙하던 것에서 낯섦을 느낄 때

<아따맘마>와 <How  I met your mother>


매일 밤 씻기 전에 <아따맘마>를 보는 게 습관이 됐다. 올해에 시작된 습관인데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왜 하필 <아따맘마>냐고? 마음 편히 만화를 보던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아따맘마를 켜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등학생 때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러 저녁을 먹은 뒤 야간 자율학습을 하러 다시 학교로 가곤 했다. 하교 후 한 시간 남짓한 저녁시간 동안 밥을 먹으며 아무 고민 없이 투니버스를 봤었다. 가끔은 스펀지밥도 보고 코난도 봤지만 가장 좋아한 만화는 <아따맘마>였다. 매 에피소드마다 소소하게 재미있는 상황들이 펼쳐졌다. 인간이란 늘 그렇듯, 자신이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법, 그때만 해도 하루 종일 공부만 해야 하는 내 처지가 힘들었는데(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좋은 시절) 만화를 보면 힘든 마음을 지울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엄격한 교칙에 억눌려 있다가 비로소 집에 도착해서야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아따맘마>는 그 편안하고 안온한 시간을 함께 해주는 좋은 친구였다.


성인이 되어서 오랜만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아따맘마>를 보게 됐는데, 익숙했던 평온함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교복 치마 지퍼를 대충 풀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아따맘마>를 보며 불린 시리얼을 먹던 열일곱 살의 나. 거실로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빛이 비추고 내 무릎에 기대 잠든 개의 온기가 느껴지던 그때. 야자실과 시험의 기억은 끔찍하지만 그때 그 시간만큼은 너무도 소중하다. 지금은, 십여 년 전에 나를 억눌렀던 공부의 무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생업의 무게를 지고 있지만, 여전히 아따맘마의 효과는 유효하다. 보고 있으면 마음 한 켠이 편안해진다. 

 



오랜만에 만난 옛친구가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러나 완벽히 평온하기만 한 건 아니다. <아따맘마>는 그대로지만 십여 년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고 나도 많이 바뀌었다. 지금 방영되었다면 당연히 문제시되었을 상황들이 많았다. <아따맘마>에는 가부장적인 폭력도, 그에 대한 순응과 순종도 자주 눈에 띄는 편이다. 몇몇 에피소드는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과 대사를 그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어색하고 낯설었다. 가령, 무더운 여름에 동동이와 아리는 자기 방에 에어컨을 설치해달라고 조르는데, 아리는 동동이의 논리를 이기기 위해, 자신은 "여자니까" 설치를 해달라는 말까지 한다. 엄마는 아리에게 "너는 여자니까 부엌일을 도와야 한다"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아리는 그걸 잘 따른다. 아리의 꿈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멋진 아침을 차려주는 고상하면서도 헌신적인 여성이다. 아버지는 가장, 어머니는 가정주부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고정되어 있고 엄마는 아리와 동동이에게 아빠에게 충성하라는 발언도 자주 한다. 그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만화를 봤다니 그동안 세상도, 나도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다. 이토록 익숙한 콘텐츠에서도 낯섦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그걸 받아들이는 내가 변했다는 뜻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로 <How I met your mother>을 다시 봤다. 수년 전에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내향적이던 나는 약속 없는 저녁이나 주말이면 주로 집에서 HIMYM를 봤다. 테드와 마셜, 릴리, 바니, 그리고 로빈은 내 친구이기도 했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언어 장벽 때문에 종일 식은땀을 흘리다가 집에 돌아오면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 HIMYM가 많은 도움이 됐다. 집에는 오랫동안 봐 온 것 같은 익숙한 미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몬 쿠키를 먹으면서 HIMYM를 보는 게 유학시절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 성격이 내향적이라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사교적인 친구들과 비교해서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하던 시절이다. 억지로 외향적인 척을 하며 다녔고 그래서 집에 있을 때 가장 평온했다. 그게 가장 나다운 생활이란 걸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모든 시즌이 끝났고, 바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HIMYM는 잊고 지냈다. 잊고 지냈다고는 해도 내게 HIMYM는 최고의 시트콤이었다. 시즌으로 이어지는 복선과 매 회 위트 있고 재치 있는 에피소드들, 그리고 '로빈'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별한 감정도 그렇고.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게는 최고의 미드였다.



그렇게 수년만에 HIMYM를 다시 봤는데 그때의 평온함이 다시 느껴졌다. 오랜만에 익숙했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예전에는 못 봤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학생 때는 테드와 친구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이제는 내가 더 나이가 많아졌다. 테드와 친구들은 내가 했던 고민과 같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직장과 직업 때문에 고민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는 전혀 몰랐던 부분이었다. 마셜과 릴리가 결혼 준비를 하는 에피소드도 이제 남일 같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 다 알고 있고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테드와 친구들에게서 또 다른 익숙함을 발견한 것이다. 


수년 전에는 익숙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불편한 에피소드들도 있었다. 특히 테드와 바니가 만나는 여성들을 대상화하고 품평하는 듯한 태도가 충격이었다. 테드는 여자친구가 한때 바니의 데이트 상대였다는 걸 알게 되는데,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면 바니가 그녀를 정복했다는 상상이 계속되어 결국 그녀와 헤어진다. (테드의 상상 속에서 바니는 작은 미니어처처럼 등장해 테드 여자친구의 입술과 가슴에 '여긴 내가 먼저 왔다 갔다'며 작은 깃발을 꼽는다.) 미투 운동 이후 미국 콘텐츠에도 수많은 변화가 생겼다. 만약 HIMYM가 지금 기획되었다면 결코 이런 에피소드를 방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HIMYM 에피소드 중 하나인 '중재위원회',  친구에게 솔직하게 불편했던 점을 말해준다.



집처럼 익숙하던 콘텐츠들도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HIMYM은 웃긴 에피소드가 정말 많지만 더 이상 재생하지 않는다. 유학시절,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겨주던 테드와 친구들, 그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어서다. 한때 소중하고 익숙했던 콘텐츠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는 걸 좋아하지만, 몇몇 콘텐츠는 그대로 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콘텐츠는 변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변할 테니까. 


익숙한 감정이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치관이 뚜렷해지면서 익숙함의 기준도 조금씩 달라진다. 한때는 익숙하고 편했던 것들이 일순간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다. 아따맘마와 HIMYM는 분명 잘 만든 콘텐츠이고 여전히 아끼는 콘텐츠이기는 하지만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익숙함과 완벽히 동일한 익숙함을 더 이상 느낄 수는 없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때는 내게 그런 소중한 감정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한다. 여전히 피로한 저녁에는 아따맘마를 한 편 보곤 하지만 불편한 부분은 과감히 넘겨버린다. 만약 아따맘마를 지금 다시 만든다면 분명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기억해두려고 덧붙이는 이야기]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좋은 친구도 물론 있다. 오랜만에 봤기에 더 성숙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말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열 다섯 때 처음 봤었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최고로 좋아하는 영화로 그 영화를 꼽았었다. 그리고 스무 살, 학교 시청각실에서 상영해주어서 혼자 어두운 시청각실에서 앉아서 다시 봤다. 여전히 내게 최고로 좋은 영화였다. 스물다섯 살 때, 세 번째로 그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엉엉 울었다. 어쩌다 보니 오 년 주기로 다시 보게 된다. 나는 곧 서른이다. 이제 네 번째로 볼 차례다. 이번에는 어떨지 아직 잘 모르겠다. 울지, 웃을지, 아무렇지 않을지.

영화 <라라랜드>가 처음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봤다가 영화 중반부터 눈물 콧물 범벅이 돼도록 울었었다. 영화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도 감정이 정리가 안돼서 영화관이 텅 비도록 자리에 앉아 울었다. 그때 나는 꿈을 거의 포기하던 상태였다. 내 상황 때문에 북받치기도 했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도 슬펐다. '그랬다면 어땠을까'하는 애틋하고 아련한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에 나는 언제나 약하다. 그 후 극장에서 <라라랜드>를 혼자서 몇 번 더 보고 몇 번이나 울었다. 그랬던 영화인데, 상영이 끝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봉인해두고 싶어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몇 년 후에 다시 보면 그때의 나는 어떨지 모르겠다. 한 때는 그랬었다고 추억하고 말지, 여전히 못 이룬 꿈 때문에 서글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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