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주신 봉선화

다시 물들이는 여름밤

by 시샘달 엿새


"아버님, 혹시 내년에는 봉선화를 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아버님의 화단에는 내가 모르는 화초가 많다. 어림잡아 서른 개도 넘는 것 같은데, 댁에 방문할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은 화분도 있고 하도 많이 여쭤봐서 드디어 익힌 꽃도 있다. 원래 식물에 관심 없는 나도 자주 보니 정이 든 것인지, 어느 날부터 꽃 향을 맡고 사진을 찍으며 그곳에서 놀곤 한다. 궁금하면 하나 가져가서 키우라고 권하시지만 우리 집에 오면 선인장도 죽는다며 한사코 사양을 반복하는, 나는 식물 킬러 며느리다. 그런데도 자꾸 아버님의 화단이 궁금해졌다. 사계절 심심할 틈도 없이 달라지는 꽃들의 세계에 나도 몰래 빠진 모양이다. 한 달 전, 댁에서 여느 때처럼 화단을 구경하다가 문득 내가 좋아하는 꽃을 아버님 찬스를 빌려 만나고 싶었다. 여름이니까. 봉선화가 보고 싶었으니까.




내 기억 속 외갓집에는 마당 한가운데 동그란 화단이 선명하다. 돌로 둘러싼 그 안이 궁금해 기웃거리면 아기 소나무 같던 분재도, 이름 모를 나무도 보였고 간혹 할머니의 살림살이도 아무렇게나 놓였다. 그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봉선화였는데, 매년 그곳에 절로 피는 것인지 할아버지가 심어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손녀들 몫임은 분명했다. 방학이라 모두가 모인 여름날, 마루 천장에 홀로 돌아가는 선풍기에 의지해 옹기종기 수박을 먹으며 옛날 얘기도 오가던 중, 사촌 언니의 주도로 봉선화 꽃잎과 이파리를 따다 돌로 찧었다. 예쁜 꽃이 짓이기며 퍼지는 풀 내음과 저 멀리 피어오르는 모기향이 묘하게 어울리는 밤이었다. 언니는 꽃 반죽을 콩알만큼 떼서 내 손톱 위에 올리고 미리 잘라놓은 비닐로 꼼꼼히 감싸 실로 동여매 주었다. 열 손가락 끝이 숨을 못 쉬는 것 같았지만 하룻밤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봉선화 손톱을 기다리던 그 밤은 쉽게 잘 수 없었다. 모두가 잠든 밤, 말똥거리는 눈으로 여러 차례 손가락을 봤다. 이러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잠을 청하려 노력했지만, 밤을 가르는 소낙비나 저 멀리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어렵게 밤을 보냈다. 닭도 깨지 않은 어슴푸레 새벽에 눈이 절로 떠지면 깜짝 놀라 손톱부터 확인했다. 자는 사이 어찌 된 모양인지 하나, 둘은 손가락을 이탈해 이불 위에서 비닐 거푸집을 찾게 되었다. 이미 연한 주홍으로 변한 손톱에 다시 끼워 맞추고 짙은 색깔을 위해 약속한 하룻밤을 채우려고 다시 잠을 청하던 여름날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여름이 올 때마다 아이와 봉선화 기억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허나 문제가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는 외갓집 화단에, 아니면 학교 가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그 꽃이 자랐는데 이제는 어디서 이 한 떨기를 구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찰나, 아버님의 화단에 봉선화가 들어선다면 충분히 옛날처럼 주홍빛 여름을 만들 것 같았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꽃을 가꾸시는 아버님께 내년 봉선화를 부탁드린 것이다.



며칠 전 온종일 비 내리던 날 아버님의 전화를 받고 문밖에 나가보니 빗물에 젖은 봉선화 화분이 나를 기다렸다. 이미 예쁜 꽃이 만개해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당장에라도 손에 물들일 것 같은, 우리 아이 키만 한 화분을 구해 주셨다. 마침 지나가는 길에 발견하셨다고, 사나흘에 한 번씩 물을 주라는 말씀을 새기는데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커다랗게 맴돌아 꽃을 그냥 딸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날짜를 기억하며 물을 주었지만 물이 모자란 건지, 과한 것인지, 아니면 장마철이라 빛을 못 봐서인지, 잡동사니가 가득한 베란다가 답답한 것인지 영롱한 꽃잎이 자꾸 시들어갔다. 안 되겠다 싶어 화분 자리를 옮기고 아이와 함께 물을 흠뻑 줬다. 아무리 내가 식물 킬러라지만 이렇게 보내기에는 마음이 쓰였기에 자꾸 봉선화가 눈에 밟혔다.



오늘 새벽이었다. 어젯밤만 해도 없었던 꽃잎 하나가 거짓말처럼 활짝 폈다. 그 옆에는 꽃봉오리가 코랄 색을 품었다며 슬며시 얼굴을 비쳤다. 내일도 기대하라는 희망의 언어 같았다. 갑자기 잠이 달아난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 쳐다봤다. 진정,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곧이어 잠에서 깬 아이에게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전하니 자기도 궁금하다며 바로 이불을 박찼다. 아이도 꽃에 눈을 떼지 못하며 어제 본인이 물을 줬다고 무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문득 꽃잎 향이 기억나지 않아 꽃에 저절로 코가 닿았다. 그 옛날 꽈리 열매 향과 비슷한 봉선화 향이 코끝을 스친다. 아버님이 주신 봉선화 꽃분은 내 어릴 적 주홍빛 여름밤을 와락 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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