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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Sep 05. 2021

난데없이 제주도 여행

출발 by 김동률


“야, 당장 비행기 표부터 사자. 안 그럼 우리 또 못 가.”



내 대학 친구 H는 실행력이 갑이다. 그녀의 결단은 늘 우물쭈물하던 나에게 어떤 고민의 마침표이자 느낌표를 선사했다. 당시 우리는 4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상태. 아니 그보다도 생애 최초로 취업 원서라는 걸 써보면서 지원하는 족족 서류 광탈의 매운맛에 얼얼하던 나날이었다. 매일 밤 자소서를 써대느라 다크서클은 짙어졌고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된 건가. 왜 젊은이들은 좌절하는가. 청년 실업자를 양산하는 사회를 원망하며 인생의 쓴맛을 서서히 맛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얘기하면서 난데없이 제주도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취업도 안 되는데 그냥 바람이나 쐬고 싶다고. 토익이며 자소서며 이것저것 다 짜증 나니까 좀 쉬다 오고 싶다고. 작년에 선배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제주도 졸업 여행을 다녀왔다는데 우리 동기들은 심심한 애들만 모인 터라 가고 싶어도 지를 수가 없는 찰나, 그냥 우리끼리만 가는 게 어떨까 나온 말이 티켓 구매 일보 직전까지 이어진 것이다.



결심이 서자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 말대로 어영부영하다가는 또 놓친다. 도서관 컴퓨터를 찾아 당장 제주행 비행기 편을 알아봤다. 마침 저가 항공이 서서히 날개를 달고 성수기 전이라 선택지가 많았다. 게다가 우리는 학생이라 부르고 백수를 뜻하는 취업준비생이라 시간이 남아돌았다. 즉, 굳이 주말 말고 평일을 골라 더 저렴한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둘이 맞는 날짜를 골라 바로 그 자리에서 왕복 10만 원 정도를 체크카드로 긁었다. 통장에 20여만 원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앞뒤 생각 없이 질러버렸다. 내친김에 숙소도 알아봤다. 1박에 7만 원 하는 펜션이 있어 이틀 치를 결제했다. 순식간에 잔고가 초라해졌다. 한편으로는 생활비 걱정이 올라왔지만 잠깐일 뿐,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이렇게 뭔가에 홀린 듯 우리의 제주 여행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고 종강 후에도 여전히 원서를 쓰면서 제주 가는 날만 기다렸다. 일상을 탈출한다는 소원 하나만으로 유월 중순의 어느 날, 드디어 하늘을 날았다.



비행기가 땅에 닿자 야자수가 우릴 반겼다. 이게 꿈인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기숙사에서 토익책을 쌓아놓고 있었는데 내 머릿속 BGM은 제주의 푸른 밤이 절로 재생되며 온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아마 중문 쪽에 있는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알아봤다. 스물네 살 아해들은 운전면허가 없었고, 여행 전 그 넓은 제주를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여행용 가방을 하나씩 끌고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올랐다.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숙소에 짐을 풀고 오는 길에 봐 둔 갈치조림 식당을 찾았다.



“제주 왔으니 갈치 한번 먹어줘야지.”



우린 갈치조림 小자를 시켰고 2.5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여행지 물가에 충격을 받아 볼멘소리를 하며 떡볶이 맛 생선조림을 싹싹 비웠다. 지금 같으면 블로그를 비롯해 각종 정보를 샅샅이 뒤져 OO 근처 맛집을 검색하며 예산은 물론 맛도 예상했겠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폴더폰을 쓰던 때라 인터넷 검색에 제약이 있었고 이번 여행은 왠지 발이 닿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내 친구 H가 코스를 봐왔기에 난 그런 그녀를 믿고 그저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올레 여권에 도장 찍어준다고 하니 팬시한 걸 좋아한 나는 스탬프 유혹에 넘어가 무작정 걸어 보기로 했다.



‘길을 걷는 게 뭐 대수라고! 뭐 맨날 걷잖아?’ 그냥 반바지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가볍게 산책하려 마음먹었는데, 갑자기 산이 나오고 좁은 길이 나오고 외딴집이 나오고 소처럼 커다란 개가 나오고 길이 끊겨 바다가 나오기도 했다. 우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바다를 건너며 (거짓말 아님) 나중에 제주에 와도 다신 올레길을 걷지 말자고 결의했고 아주 친절히 코스별 쉬어가는 코너와 밖으로 빠지는 길을 만들어준 덕분에 중도에 길을 새어 나와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몇 킬로를 걸었던 터라 다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그리고 곧 머리도 지근댔다. 식도락 여행을 꿈꿨지만, 아시다시피 갈치조림 값에 놀라 우리는 첫 식사를 마치고 식비 긴축 정책을 시행하기로 합의봤다. 푸른 제주의 첫 밤, 우리는 넓디넓은 펜션에서 라면을 끓여 먹은 후 아픈 발을 올려놓고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각자 가보고 싶은 장소를 골랐다. 연리지 식물원, 테디베어 뮤지엄, 천지연인가 천제연인가 천 어쩌고 폭포, 그리고 오설록 티 뮤지엄을 선택했다. 공항에서 가져온 버스 노선도를 몇 번이나 펼쳐 동선을 짜 보고 그래도 안 되면 택시를 탔다. 식비를 아낀 덕분에 뭘 먹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내키는 곳은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내린 선택이라 후회는 없었다.



아무도 없는 식물원은 수목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곰돌이 박물관은 너무 귀여워서 미칠 것 같다는 호들갑만 남았고, 오설록에서는 이곳이 진정 마케팅의 절정이라며 감탄했다. 아! 녹차밭 뱀을 조심하라는 무시무시한 문구도 남아 있다. 그중 압권은 천 어쩌고 폭포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폭포가 어디 있단 말이야!”



무성한 풀과 나무로 만든 길이 쭉 이어지는데 만약 안개라도 자욱하면 굴러 떨어져 죽어도 모를 것 같았다. 다행히 날은 나쁘지 않았고 단지 초여름의 습윤함이 온몸을 감싸면서 빠른 속도로 촉촉한 땅바닥을 따라갔다. 친구 H가 앞장섰고 난 뒤를 이었다.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었다.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었다. 삼다수 하나, 내 낡은 DSLR, 때 묻은 버스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빠르게 걸어봤다.

이곳에서 길을 잃어도 잠시 숨을 고르며
처음 만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기억의 시간과는 달리, 어딘가로 이끌리듯 걷던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간 이들이 폭포 가는 길을 만들어놨기에 곧이어 시원한 폭포 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리가 뻥! 하며 뚫리는 상쾌함을 맛보았다. 이거구나. 이러려고 여기 왔구나.



지나가는 길에 판매하는 야자수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천상의 맛일지 너무 궁금했지만, 우리는 차비가 모자랄 수 있기에 사진으로만 담았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하면서 이틀째 여행을 마무리했다. 역시 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본 파일은 다 사라지고 인화로만 남은 그때 사진
꼭 한번 먹고 싶던 야자수 열매


마지막 날에는 성산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나와 여행용 가방을 끌며 제주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달렸다. 훗날 돈을 벌게 되었을 때 여행에서 시간은 돈이라고 들었는데, 우리의 제주에서는 이동하는 데만 돈을 낭비한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 여행지 말고 사람 사는 제주를 버스로 바라보면서, 그리고 자주 멈추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는데 그게 그저 좋았다. 심지어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곧 졸업을 앞두고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할 미래를 준비하던 우리, 몇 시간 뒤면 마칠 이번 여행을 두고 각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땡볕 아래 성산 일출봉에 올랐다. 아래에서는 볼 수 없던 넓은 바다가 그제서야 눈으로 들어왔다. 스물넷 그때는 수학여행 이후 다시 가본 명소로 남았는데, 강산이 한번 변하고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니 그날 이후로 푸른 바다를 품으며 살게끔 도와준 것 같다.



마지막 식사로 일출봉  작은 식당에서 오분자기 뚝배기를 먹었다. 오분자기가 뭔지 그날 처음 알았다. 공항 가는 버스를 탔고 늦은 오후 비행시간이라 분명 여유가 있었는데, 퇴근 시간과 물려 갑자기 여유가 없어졌다. 우리는 비행 30분 전인가 간신히 공항에 도착했고  호들갑을 떨며 간신히 탑승 수속을 마쳤다. 곧이어 여름밤을 날아 김포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난데없이 떠난 우리의 제주는 더 넓은 세상으로의 출발이었고 내게 그 여운은 영원히 남았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가을, 봄이면 그리고 스물넷의 그때처럼 촉촉한 초여름이라도 언제든 좋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으면 제주와 ‘출발’이 뭉게구름처럼 떠오른다.


https://youtu.be/LTudX-OM7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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