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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Aug 31. 2020

수강신청 대첩의 기억

마우스 클릭 소리가 아직도 맴맴 돈다

때는 2006년 2월. 대학 입학식을 마치고 걱정거리가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수강신청이었다. 시간표를 내가 만들다니! 심지어 주4 수업이 가능하다고?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정작 수강신청을 어떻게 하는 건지 방법을 모르는 상태였다. 개강을 앞두고 학과 모임에 나갔는데 난데없이 선배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나를 어떤 강의실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한 선배가 지금부터 수강신청을 알려주겠노라고, 이걸 망하면 한 학기는 끝장나는 거라며 내가 도움을 줄 테니 새내기들은 잘 따라 하기만 한다고 외쳐댔다. ‘오호라, 도움이 필요했는데 제대로 찾아왔군’



내 손에 이번 학기 수강신청 책자가 들어왔다. 커다랗고 얇은, 표지에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책자를 훑어보니 알 수 없는 표들로 가득 찼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떤 선배 책자는 얼마나 열어본 건지 표지가 너덜대는 것 같았고, 시끄러운 선배는 “내 전공과목 페이지를 한 번에 펼칠 줄 알아야 아, 학교 좀 다녔다고 말하는 거야." 라며 허풍을 떨었다. 그 책자에는 전공별, 학년별 전공과목이 나열되었고 요일과 시간, 강의실 장소, 학점 등이 표기되었다. 그 뒤에는 교양 과목이 이어졌다. 졸업을 하려면 몇 학점이 필요한데 학기별로 21학점을 신청할 수 있고, 거기서 전공 필수와 전공 선택을 잘 배합하고 교양도 필수를 먼저 넣고 인기 많은 교양 과목은 뭐라며 한참 발표가 이어졌다. 그 말이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동시에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서 난 그저 발표하는 저 선배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번 학기는 무탈하겠다 싶었다.



결전의 순간이 찾아왔다. 수강신청 당일 상경대 전산실에 모였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다른 학과 학생들이 선배들의 머릿수를 빌려 전산실을 점령해버렸다. 우리는 작전상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파견 나간 선배는 도서관에도 PC실이 만석이라고 알렸다. 발표 선배는 지금 당장 정문 앞 피시방으로 뛰어가라고, 빨리 간 사람이 최대한 많은 자리를 확보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동시에 몇십 명이 등굣길을 내려갔다. 다행히 과 동기가 생긴 터라 덜 부끄러웠다. 그 틈에 섞여 뛰어가면서 나는 누구이며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걸 놓치면 이번 학기가 날아간다니 별수가 없었다.



날쌘 선배가 좌석을 다량 확보한 덕분에 나와 동기들은 무사히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수강신청 이론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면, 오늘은 실전이었다. 반드시 이 수강신청 전투에서 이겨야만 했다. 강의실에서 멋지게 PT를 하던 선배가 이번에는 우리 주변을 서성대며 목이 터지라 외쳐댔다.


“자, 이걸 장바구니라고 생각하면 돼. 과목들을 미리 담아놓고 이따 10시 되면 실제로 신청하는 칸이 생기거든? 그걸 열심히 누르는 거야. 전교생이 한꺼번에 클릭하니까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클릭해야 돼!”


선배들은 이미 우리 시간표를 다 짜 놨었다. 우리는 그 목록에 맞춰 미리 장바구니에 담고, 교양 과목은 친해진 동기와 함께 골랐다. 혹시나 실패할 때를 대비한 플랜 B 과목도 담아놓았다. 10시에 홈페이지가 바뀌니까 정신 차리고 바로 들어가야 한다고, 오늘 망하면 답이 없다고 귀가 아프도록 똑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들었다.



어느덧 시계가 9시 50분을 가리켰다. 갑자기 선배들이 분주해졌다. 모두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계를 주시하라고, 화면은 학교 홈페이지를 켜놓으라고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또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잠시 또 느슨해지는 틈을 타라떼는 말이야. 종이   들고 단과대 별로 뛰어다니면서 사인받았어. 세상 좋아진  알아.”라며 전산화 이전을 회고했다. 그러니까 나는 14년 전 캠퍼스에서 라떼를 들었던 셈이다. 그러려니 하면서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9시 59분이었다. 초시계까지 켜놓고 카운트 다운을 외치는 사람들 덕분에 2002년 월드컵 스페인전 승부차기를 하는 것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10 AM. 순간 시끌벅적 대던 공간이 마우스 클릭 소리로 뒤덮였다. 그 짧은 3초 정도의 시간에 승패가 결정된 것이다. 한쪽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다른 쪽에서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는데, 정각이 되자마자 광클했지만 순간 화면이 멈췄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금 후에 페이지가 무사히 열렸고 전공과 교양 과목 모두 성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선택한 교양 과목이 별로 인기가 없던 탓이라 가능한 전략이었다.



모쪼록, 직접 겪은 경험은 잊지 못하는 법이다. 대학 첫 수강신청을 성공리에 끝내고 한 학기를 경험해보니 수강신청 대첩 승리 공식을 체득하게 되었다.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안에서 수강신청을 해야 최대한 빨리 접속한다는 카더라에 나는 졸업할 때까지 수강신청 날이면 학교를 지켰다. 그리고 나도 선배가 되었다. 어쩌면 매해 새내기들이 들어올 때마다 “라떼는 말이야. 전산실에 자리가 없어서 학교 밖으로 뛰어갔어.”라며 라떼 정신을 계승한 건지도 모르겠다. 개강을 앞둔 학교를 생각하니 마우스 클릭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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