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second
나는 진정 마감의 스릴을 즐기는가? 여유로운 준비는 이론으로만 가능한 건가. 왜 매번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가 마감이 임박해 가까스로 세이프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아니, 마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왜 짜증을 내는 걸까. 미리 안 한 건 나 자신인데,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래전부터 마감의 스릴은 삶에 밀착해 있었다. 최소 한 달 전부터 시험 기간 안내가 있었지만 탱자탱자 놀다가 며칠 전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심지어 어떤 과목은 전날 시험 범위를 알아보기도 했다. 이 며칠의 액기스처럼 매일 공부했으면 S대를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고시도 찹쌀떡처럼 붙었을 것이다.
숙제도 마찬가지다. 수행평가로 이름 붙은 학창 시절부터 대학 때 숱한 과제까지 학기 초에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안내하셔도 마감일이 다가올 때까지 최대한 열심히 안 했다. 참 신기했던 사실은 조별 과제를 해도 이 현상은 똑같았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인가? 내 마음이 네 마음 같았다. 과제라는 말을 꺼내기도 귀찮았는지 누구도 먼저 하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제출 하루 전, 밤을 새워서라도 조원들은 과제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쯤 되면 무엇인가를 미리 한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아예 없는 것 같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요즘 매일 글을 쓰는 나로서 이토록 막판 스퍼트를 내는 이유는 뭘까 문득 궁금해졌다. 끝까지 완벽하고자 함인가? 이렇게 만든 작품(!)을 제출하고 한숨을 돌리면 오·탈자가 왜 이렇게 많이 보일까.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이상하고 조사도 어딘가 어색하다. 그리고 옛날 언어영역에서 자주 만났던, 흐름에 어긋나는 문장을 골라라가 참 많이도 보인다. 다시 읽을수록 눈으로 그려보는 빨간색 첨삭 표시가 모니터를 가득 메운다. 아, 허술하기도 짝이 없다. 내 양심도 없다. 이 질문에는 애초부터 완벽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면 이론상 여유롭게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답을 내본다.
그렇다면 나의 집중력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에 드는 것인가? 이건 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평소에는 알아서 제 역할을 하던 나의 모든 감각 세포가 마감이 임박할수록 하나가 되는 기분이다. 주변이 시끄러워도 아기가 나를 붙들고 흔들어도 글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표현에 제한이 있는 이 기분은 마감을 지키고 제출을 했을 때 한꺼번에 표출되면서 마치 9회 말 투아웃의 끝내기 안타를 친 것 같은 짜릿한 쾌감을 준다.
내가 바빠서 늘 마감에 쫓기는 걸까? 자문한 것이지만 질문 자체에 실소가 흐른다. 자신을 스스로 돌아봤을 때 시간이 없다는 말처럼 한가하기 짝이 없는 핑계는 없었다. 공평하게 부여받는 하루 24시간은 내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시간 부자처럼, 시간 거지처럼 쓸 수 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질문은 이쯤에서 접어두자.
오늘 나에게 중요한 마감이 두 개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최소 한 달 전부터 마감기한이 정해진 상태였다. 역시 나는 두 가지를 하지 않은 상태로 오늘 23:59까지 제출하면 된다는 상황만 염두에 두고 핸드폰을 보며 놀고 있었다. “성실해서 결국 성공하는 사람들이 꼭 지키는 5가지 습관”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다섯 가지 중에 두 번째, ‘시간을 반으로 줄인다’가 나의 뼈를 때렸다.
성실한 사람들은 과제를 3일 동안 할 계획이면 이틀 안에 마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그 시간 안에 못 마쳐도 일을 대부분 끝내 놓으면 문제가 되는 부분에 집중할 시간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니 나는 ‘성실하지 않아서’ 매일 마감에 쫓기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복잡한 질문에 간결한 답이 나에게 큰 수확이었다. 이상, 오늘 두 개의 마감을 미리 하지 않고 끝까지 미루면서 쫓기다가 불현듯 떠오른 ‘마감’ 대한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