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untitle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달 엿새 Apr 26. 2020

4년 만에 파마를 했다

엄마가 머리 하러 가는 날


"헉! 야단났다!!" 아뿔싸 자동차 문이 안 열린다. 수동으로 문을 열고 시동을 켜보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늘 아침 쌀쌀한 봄바람을 맞으며 함께 찾아온 계획에 없던 일, 첫 번째였다. 짐은 한 가득이었고 출발 예정 시각보다 지나고 있지만 왠지 괜찮았다. 보험회사에 연락해서 처리하면 되니까. 15여 분 만에 천사 같은 아저씨가 오셔서 산뜻하게 해결하시고 시원하게 갈 길 가셨다. 무사히 시동이 걸리니 다행이었지만 바이러스 출현 후 방치된 우리 집 빠방이 안쓰러웠다. 홀로 봄 구경 실컷 하면서 저문 꽃잎도 와이퍼 한가득 품고 있었다. 내가 대신 미안하다. 처음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러 가는 날이었다. 방방 뛰는 아기와 환하게 우리를 맞이해주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다. 잘 놀고 있던 꼬마가 나에게 미용실에 다녀오라고 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자기는 하비지, 할미랑 같이 논다고 머리 잘하고 오라고 했다. 내 다리에 매미처럼 찰싹 붙는 꼬마가 그간 숙원사업이었던 미용실 방문을 시원하게 결재해주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날릴 수가 없었다. 오늘 계획에 없던 일, 두 번째였다. 제대로 날을 잡았으니 오늘은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던 파마를 해보기로! 시간을 따져보니 4년 만에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육아하면서 미용실은 가고 싶어도 가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육아와 집안일에 방해되는 긴 머리는 사치였다. 손을 댄 머리는 그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방문을 해야 하는데, 이 잦은 방문이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나의 머리카락은 태초 그대로, 어떤 약품도 스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자라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이 건강에는 좋았겠지만 내 정신에는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오랜만에 약속이 있을 때 걱정거리였다. 하다 하다 안 되겠어서 두 번의 여행을 앞두고는 번개 같은 속도로 염색했고, 너무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눈치 보며 자르기도 했지만 이렇게 마음먹어야 하는 거사(!)는 정말 오랜만이라 설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서부터 나를 위한 서비스가 시작했다. 짐도 맡아주시고 가운도 입혀주시니 은근 기분이 좋았다. 샴푸 먼저 하면서 누워보는 자동 의자는 올 때마다 더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눈감고 가만 누워있자니 물소리가 산속 작은 폭포 같기도 했는데 시원해지는 느낌에 이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젖은 머리로 나를 안내해주신 자리에 앉으니 독서대에 두 권의 잡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워서 요청했던 시원한 커피도 가져다주셨다. 열처리하면서 그곳에 앉아 잡지도 보고 휴대전화도 보고 커피도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 원래 이런 곳이었지만 4년 만에 앉은 그 자리는 나에게 진정한 자유를 허해주는 장소였다.



광고와 화보가 계속 이어지다가 중간쯤에 이르니 읽을거리가 많았다. 요즘 이런 게 유행이구나, 이런 생각도 하겠구나 하면서 마음에 드는 사진과 따라 해보고 싶은 글을 새겨보았다. 가끔 휴대전화 세상도 확인하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커피를 마시다 보니 머리 하러 왔지만 지금 이 순간 온전한 휴식을 하는 것 같았다. 나만의 세계에 열중해있는데 어느새 나의 그가 가까이 와서 여기 온 후로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웃고 있었다. 응, 맞아. 기분 엄청 좋아.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안 좋을 수가 있겠어. 그러다 자리를 옮겨 머리카락을 다듬고, 요상스러운 기계에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창가 쪽 자리에서 사람을 구경하며 또 잡지와 휴대전화를 번갈아 보고 담소를 나누며 미용실에서의 시간이 열심히 흘렀다.



머리카락을 피기도 하고 드디어 마지막 단계. 염색이 이어졌다.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하면서 또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두어 번 정도 머리를 헹구고 마지막으로 드라이하니 대장정이 마무리되었다. 한결같이 친절한 직원분들에게 참 고마웠고 나는 4시간 반의 자유시간을 제대로 누렸다. 어느새 저녁때가 다가와 마음이 급했지만 이왕 나온 거 근처 서점에 들러보았다. 여기도 오랜만에 방문해서 궁금한 게 많았으나 사고 싶던 책 한 권만 사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 손바닥만 한 시집이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담고 있을 줄이야. 오늘 완성한 머리카락을 앙칼진 봄바람에 휘날리며 몇 달간 갇혔던 내 맘속 어떤 응어리는 산산조각내며 공중에 흩어졌을 것이다.



오늘 예정에 없던 두 가지 일. 자동차 배터리 방전 사건과 4년 만의 파마는 평소 관리를 했다면 없었을 일이다. 자동차에 마음이 식어가지만 가끔 시동이 걸리는지 정도는 확인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예기치 않은 사건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내 머리카락을 참 오랜만에 전문가들의 손길에 맡기며 나에게 주어진 유한한 자유시간의 진가를 알았다. 과거 같은 장소에서 이런 감정을 못 느꼈는데 오늘만큼은 희소하게 다가왔기에 뚜렷한 행복을 맞이한 것이다. 나를 관리하지 않은 시간이 4년이 넘었다는 사실에 알면서도 놀랐다. 또 자랄 머리카락이지만 가끔은 기분 전환을 위해, 오롯이 나를 위해 파마를 말면서 나를 아끼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자. 당분간 머리 묶지 말아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마감에 쫓길수록 짜증 내는 나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