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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May 02. 2020

식탁 로망

지금 여기

아침이 오는 소리에 잠이 깨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조용히 몸을 옮긴다. 물방울 소리도 크게 들리는 이 시간 적막한 공기를 뚫고 도착하면 자연스레 창밖으로 시선이 향한다.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있어도 하늘과 커다란 나무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 우리 집 식탁이다. 오늘 날씨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창가 벤치 의자에 앉아 그냥 멍하니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러다 사과도 한쪽 먹고 아니면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다시 피어오르는 잠 기운을 물리쳐본다. 오늘은 뭘 할까. 뭘 해야 하나. 무슨 숙제가 있었나.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은가.



식탁 로망이 있었다. 열 살 때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식탁이 생겼다. 집을 넓히면서 살림을 확장하셨는데 처음 생긴 내 방보다 식탁이 더 좋았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가끔 볼 수 있던 식탁은 갖고 싶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런 가구가 우리 집에도 생겼다는 자체가 방방 뛸 일이었다. 허나 그 식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식사할 때 온 가족이 둘러앉거나 커가면서 홀로 밥을 챙겨 먹으며 한쪽 구석에는 전기밥솥이 넉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말 그대로 밥 탁자였다.



대학생이 되어 친구 원룸에 놀러 갔는데 눈에 띈 사물이 있었다. 하얀 원형 식탁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예쁜 의자 하나가 붙어 있어 둘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경제 신문, 펜이 보였고 뭔가를 먹을 때는 원래 있던 소품들을 대충 옆으로 치워놓고 다시 음식을 올려놓았다. 이 제한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여러 일을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기숙사나 좁은 집에서 살다 보니 감히 생각도 못 한 아이템을 그곳에서 만났고 그날부터 나만의 식탁을 갖고 싶다는 로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졸업 후 조금은 더 넓어진 집에서 근근이 생활을 꾸려갔지만 식탁은 역시 엄두를 못 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걸 나중에 처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같이 살던 친구와 합의하여 그냥 앉아서 사용하는 탁자를 펼쳐놓고 식탁처럼 썼다. 둘이 앉으면 꽉 차는 공간에서 아무 계획 없는 쉬는 날 함께 앉아 무한도전과 늦은 점심을 먹고 회사 생활이 격하게 억울한 날에는 매운 떡볶이와 맥주를 올려놓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신혼집을 채울 가구를 보러 다닐 때 식탁 순서가 가장 떨렸다. 두근두근 십 년 만에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고민 끝에 영리한 수납공간이 있는 아일랜드 식탁으로 골랐고 우리는 식탁을 접기도 빼기도 하면서 유용하게 활용했다. 홀로 있는 시간에는 그 위에 책을 잔뜩 올려놓고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노트북을 올려놓고 이것저것 딸깍거리기도 했다. 아기가 우리와 같은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나머지 한 자리에 아기 의자를 올려놓고 세 식구가 함께 식사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 작년 가을 이사 오면서 처음으로 들인 6인용 식탁이다. 로망을 일찍이 알고 있던 나의 그가 철저한 조사 끝에 실물을 확인하며 고른 식탁이다. 처음부터 이 식탁은 내 거라고 뻔뻔하게 얘기를 했는데 정말 내 소유가 된 것 같다. 넓은 탁자 위에 노트북 세 대, 높이 쌓인 몇 개의 책더미, 종이, 연필, 오려놓은 신문지 등등 모두 내가 이렇게 해 놓았다. 나의 영역이라고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다. 물론 식사를 할 때 여기서 한다. 한쪽으로 싹 밀어놓고 밥을 다 먹으면 닦고 다시 또 하나씩 옮긴다. 손님이 오실 때는 특별히 다 치워놓긴 하는데 가시면 바로 원복이다.



가족에게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곳에다 어지르는 시간이 좋다. 가끔은 정리를 하긴 하는데 나랑은 안 맞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컴퓨터의 어지러운 바탕화면처럼 나의 식탁도 계속 이렇게 있을 것 같다. 나의 로망 식탁에 앉아 이 시간에 집중한다. 노트북을 닫고 마음을 담아 종이에 써보는 연필 소리, 아껴 보고 싶은 좋은 책의 책장을 넘기는 소리, 글감이 떠올라 다다다다 자판을 치는 소리가 나를 둘러싼다. 즐거운 방황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요즘, 찰나에 떠오른 생각도 어떻게든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이곳에서 글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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