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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May 09. 2020

비가 내린다

오월의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며칠의 날씨가 무색하게, 잊었던 찬바람도 데려왔다. 생각해보니 오월에 한 번쯤은 비가 꽤 묵직하게 지나는 느낌이다. 더워지기 전에 지난 계절을 잊지 말라는 건가, 뭔가. 그래서인지 이맘때 비는 좀 특별하게 남는다. 비 내리는 아침은 잠이 깨면서 바로 알 수 있다. 창을 통과하는 빛의 느낌이 비구름을 한껏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빛에 어쩐지 반갑기도 하고 아니, 또 걱정도 되고 이러저러한 복잡한 생각이 뒤엉키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반가움이 더 큰가 보다. 창가를 서성이며 특별한 것 없는 비 내리는 바깥을 몇 번 구경해본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구경만 하다가 조심스러운 허락을 받고 홀로 산책을 나섰다. 습하려나? 추우려나? 비 오는 날 나 홀로 외출이 오랜만이라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몇 번 고민 끝에 창밖 나무가 소란스럽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긴소매를 선택했다. 우산을 챙겨 나가는 길에 잠깐 마주한 바깥세상은 비로 온통 진해져 있었다. 1층에 도착해 화단을 지나며 시작하는 빗길 산책이 한껏 설렜다. 때론 지렁이가 까꿍 나타나서 흠칫 놀랐지만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 그냥 좋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차들이 엉켜있었다. 토요일 맞구나. 눈치 게임을 하는 차들을 지나 목적지로 향하는 숲길에 드디어 들어섰다.



새벽과 다르다. 새벽에는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는데, 토요일 오전 11시는 온갖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소리가 뒤섞여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지렁이가 나타날까 봐 바닥을 주시하며 가고 있었는데, 내 왼쪽으로 이어지는 아파트 화단이 눈에 띄었다. 여러 이름 모를 꽃들이 열심히 비를 맞고 있었다. 한창 봄과는 달리 꽃은 몇 송이 없었고 그녀를 둘러싼 초록 풀들이 가득 메웠다. 우산을 들고 있지만 이 모습을 놓치긴 아까웠다. 그 꽃도 찍고 옆 꽃도 찍고 뒤를 돌아보니 우리 집을 향하는 방향에 뻗은 나무들이 산속 같아 또 담아 보았다. 그렇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빗속에서 찰칵 소리를 내다가 다시 갈 길을 가보았다.

빵을 사고 돌아오는 길, 올 때는 볼 수 없는 풍광에 다시 몇 번 셔터를 누르며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날 기다리는 가족에게 가는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이번에는 내 오른쪽 화단의 풀들이 눈에 띄었다. 참새가 지나갔는지 풀들이 출렁거리는 느낌에 잠시 멈춰 섰다. 알고 보니 새들은 없었고 내리는 비를 흠씬 맞고 있던 것이었다. 어찌 이렇게 단단할까. 잎끝에 맺힌 빗물이 더 영롱하게 빛났다. 저 여린 잎이 거센 비에 굴하지 않는 모습에 감탄하며 이 비가 지나면 얼마나 또 무성해질지 기대가 되었다. 아닌가? 비가 와줘서 잎이 더 자랄 수 있는 상생의 관계인 건가.



비가 아직 내리는 것 같다. 그 바람을 느끼고 싶어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이 계절 이 시간에 내리는 비는 스물여섯 살 어느 밤을 데려온다. 그날도 온종일 시달리다 퇴근 후 집에 혼자 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누워 있었다. 어라? 그런데 비가 내리는 것 같다. 분명 빗소리였다. 반가움에 창문을 열어보았다. 맞았다. 다시 침대에 누워서 그 순간에 집중해보았다. 창문을 틈타 들어오는 바람, 나지막한 빗소리가 그냥, 정말 그냥 좋았다. 라디오였던 것 같은데 'She'가 흘러나와 더 운치 있는 밤이었다.



비 오는 밤은 특별하다. 왠지 모를 아련함이 전해진다. 난 그 감상의 이유를 찾고 싶기도 하고 자유 시간도 꿈꿔본다. 어떤 방법이든 나에게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은 분명하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ZWG8enSfk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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