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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May 12. 2020

나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고

8개월 아기와 엄마의 일과

오늘 아침에도 배웅을 못 했어요. 어젯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는데, 밤새 몇 번 깨다 보니 결국 인사를 못 했네요. 미안해요. 오늘도 아기가 날 깨웠어요. 고사리손으로 내 얼굴을 강타하니 이런 입체적 알람이 또 있을까요. 아기와 함께 상쾌한 청소로 하루를 시작해요.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주시하며 조심스레 청소기를 당겨 봅니다. 요즘 한창 기어 다니며 집안을 탐험하느라 티끌조차 걱정이에요. 청소를 마치면 아기를 위한 맘마를 준비합니다. 이유식과 분유 두 가지를 챙기느라 분주한데 오늘은 잘 기다려준 것 같아요. 청소로 배가 고팠는지 오늘 맘마도 뚝딱 했어요. 비록 피부와 옷에 많이 양보했지만 뭐 어때요, 하루 목욕 세 번은 일도 아니잖아요? 아기에게 상쾌한 기분을 선사하고 그녀의 장난감 나라에 초대되어 잠시 시간을 보냈어요.




어느덧 나의 점심시간이에요. 그대는 나에게 맛있는 점심을 먹으라고 했죠. 하여 잠시 행복한 고민을 해봤어요. 시켜먹을까 유혹에 휩싸였지만 분리수거 귀찮아서 그냥 접었어요. 냉장고에 있던 어머니들의 반찬을 조합하여 밥을 먹었어요. 분명 조금 먹는 것 같은데 살이 안 빠져서 속상해요. 온종일 많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정말 억울해요. 아기가 앉아 있는 의자를 보며 점심을 먹는데 오늘 내 반찬이 몹시 궁금한가 봐요. 어느새 아기를 안고 밥을 먹었어요. 그녀의 별로 없는 머리숱에 밥알이 떨어진 것 같아요. 앗! 음식이 다 식어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먹으니 간단한 설거지를 빨리 끝내니 기다렸다는 듯 날 찾네요. 졸려서 힘들다고 재워 달래요.




너덜대는 손목은 괜찮아질 거예요. 그대도 아프잖아요. 아파도 안았을 때 볼 수 있는 졸음이 내려앉은 두 속눈썹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예뻐요. 새근새근 자는 아기를 눕히고 방문을 닫았어요. 아까 목욕했던 욕실을 청소해보아요. 커다란 욕조에 물을 버리니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눈에 띄네요. 아뿔싸. 수건이 있었나? 어라, 치약도 다 써 가네? 재빨리 욕실용품 재고를 확인했어요. 아, 이런. 너무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어서 핸드폰으로 주문을 넣어봅니다. 특히 욕실은 더 티가 나는 것 같아요. 이곳 청소만큼은 아웃소싱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요. 지금은 별수 없으니 간단하게 욕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확인해보아요. 다용도실 빨래가 한 가득이에요. 먼저 아기 빨래부터 돌리고 우리 빨래해볼게요. 아침 서랍장에 단정히 접힌 소중한 옷을 선사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구겨져 있는 모습에 내 마음이 아파요.




빨래를 기다리며 젖병을 소독했어요. 이유식도 만들어야 하는데, 도무지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이따 저녁에 하려고요. 뜨거운 물에 담근 젖병을 거꾸로 세워놓으니 커피가 무척 마시고 싶어요. 어젠가 내려놓은 커피에 생수와 얼음을 섞어 시원한 커피를 만들었어요. 빨래가 다 되었다는 멜로디와 함께 원샷하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1리터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끓었던 열을 식히며 잠시 자리에 앉아있는데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났어요. 아기가 깰 시간이에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감추며 잠시 핸드폰 구경을 했어요. 다른 아기들도 많이 크네요, 누구는 곧 결혼하네요, 이번 추석에 다들 어딜 갔는지 멋진 여행 사진도 많아요. 갑자기 너무 가고 싶어졌어요. 왠지 모르게 속상해요.




잠시 부러운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기가 깬 것 같아요. 방문을 열고 뛰어들어가 보니 역시 일어나서 날 기다리네요. 그녀와 다시 놀아요. 창밖을 보고 동요를 들어봐요. 바스락거리는 책도 보고 뭘 그리 재미있는지 신기한 까꿍 놀이도 몇십 번 했어요. 부모님들과 영상통화도 했어요. 매일도 이만큼씩 자란다고 뿌듯해하세요. 두 시간쯤 지난 것 같은데 20분 지났네요. 그래도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겠어요. 오늘은 특별히 그대가 좋아하는 김치찜을 하려고요. 맛있는 김치와 신선한 돼지고기로 정성을 담아 요리할게요. 윤기 반짝이는 쌀밥도 지어 함께 먹어요. 그래도 손이 덜 가니 함께할 저녁으로 꽤 좋을 것 같아요.




나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고 많이 생각했어요. 이 피곤한 행복 속에서 우리는 허둥대고 방황하며 이 하루가 또 지나가네요. 곧 그대가 올 시간이에요. 퇴근했다고 연락을 줬어요. 더 기다려져요. 그대도 많이 피곤할 텐데 요즘 내가 더 힘든 모습을 보여 미안했어요. 퇴근하면 얼굴 보고 말하고 싶은데 자꾸 까먹어서 이렇게라도 글로 남겨보아요. 회사 생활 아무리 뻔하다고 해도 궁금해요. 오레오(Oreo Android 8.0)에 둘러싸인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2017. 시월의 어느 날



https://www.youtube.com/watch?v=Z7FgbUOw6TY&list=RDZ7FgbUOw6TY&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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