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날

너의 오늘과 나의 옛날을 잇다

by 시샘달 엿새

아빠 차를 타고 할아버지 댁에 도착하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벌써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난다. 나만 바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조금 부끄러워 엄마 뒤에 숨는다. 엄마 옷자락 너머 눈에 익은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나는 없는 가족사진, 할아버지의 화분, 물놀이하던 큰 욕조… 점차 궁금해진다. 재미있을 것 같다. 할머니와 아빠 엄마는 부엌에 계시고 나는 할아버지랑 논다.


나를 보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인자한 웃음이 가득하다. 키가 그새 컸다고, 말이 많이 늘었다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칭찬을 해주신다. 할아버지와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내가 챙겨 온 퍼즐을 같이 하고 할머니가 사주신 기차 장난감을 신기하게 만져본다. 할머니께서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와 귤을 가져다주신다. 할아버지는 먹기 좋게 잘린 토마토를 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어주신다. 오랜만에 만난 상큼하고 시원한 토마토를 계속 먹고 싶다. 할아버지와 도란도란 놀면서 입을 아~ 벌리면 할아버지가 귤도 까주신다. 달달하고 새콤한 귤을 할아버지와 그 자리에서 다 까서 먹는다.


한참 놀다가 물끄러미 창밖을 보니 할아버지의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여름 빨간 열매를 몰래 따고 꽃향기를 맡았던 곳이다.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나가자고 해본다. 할아버지는 꽃 이름을 알려주신다. 군자란, 라벤더, 허브들이 많다. 초록색 로즈메리가 흔들리도록 손바닥으로 문질 문질 쓰다듬어 두 손을 코에 대어 향을 맡으면 상쾌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엄마와 같이 맡고 싶다. 다시 두 손에 향기를 가득 담아 신발을 급하게 벗고 뛰어간다. 전을 부치고 있는 엄마한테 가서 “엄마~ 코” 해본다. 엄마가 냄새가 참 좋다고 우리 아기가 좋은 향기를 날라 준거냐고 놀라시면서 이 꽃 이름은 뭐냐고 물으신다. 나는 신이 나서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몇 번이나 꽃향기를 나른다. 할아버지가 꽃 이름도 많이 알려주셨지만 기억이 잘 안 난다. 따라 하기가 어렵다.


갓 부쳐낸 옥수수 전이 탁자에 놓여있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 전을 특별히 많이 부치신다. 할아버지가 포크로 잘라 식혀주시면 한입 앙 먹어본다. 오독오독 고소한 옥수수 맛이 입안에 퍼진다.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먹으며 할아버지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도 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할아버지 뒤에서 까꿍 놀이를 하며 까르르 웃고 내가 다리를 쭉 펴면 할아버지가 아기 때부터 도맡아주셨다던 쭉쭉이 마사지도 해주신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부엌에서 맛있는 갈비찜 냄새가 거실까지 마중 나온다. 간식이 가득한 식탁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진다.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긴 갈비찜, 샐러드와 봄나물 반찬, 된장국과 나의 달걀프라이가 올라오고 숟가락이 총출동하면 점심시간이다. 엄마가 후후 불어 잘라주신 갈비찜을 밥숟가락에 올려 한입 먹어본다. 하얀 쌀밥과 우물우물 씹으면 명절 느낌이 물씬 난다. 천천히 먹다 보면 배가 부르고 나른해진다. 후식으로 나온 할아버지 표 식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다. 설을 맞이하며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식혜는 연구를 거듭하실수록 아빠가 좋아한 아빠의 할머니의 맛이 난다고 한다. 컵으로 식혜를 다 마시고 바닥에 모인 맘마를 숟가락으로 긁어먹어도 더 먹고 싶다. 할아버지는 맛나게 먹고 있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신다.


할아버지는 잠시 외출하시고 아빠와 놀고 있었는데 부엌일이 거의 끝난 것 같다. 엄마가 나에게 와서 안아주신다. 엄마 품에 안기니 잠이 온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계속 놀았더니 졸음을 이길 수가 없다. 엄마와 아빠 방에 함께 누우니까 스르르 눈이 감긴다. 꽤 오래 잠을 잔 모양이다. 눈을 뜨니 캄캄한 밤이 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외출한다. 외식을 하고 집에 들어와 다시 맛있는 과일을 먹고 어른들은 건배를 하시며 한가한 휴식 시간을 보낸다. 늦은 밤 아빠 엄마와 잠을 청한다.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내일도 일찍 일어나서 큰 할머니 댁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친척 오빠들도 만나고 세배도 하는 날이란다. 오랜만에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반가웠다.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어서 좋다. 내일은 오빠들을 만난다니 기대된다. 그렇게 작은 소리로 TV만 켜진 방에서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는 깊은 겨울밤 잠이 든다.




얼마 전 시장에서 엄마가 사주신 새 옷을 입었다. 동생과 선물 보따리를 하나씩 안고 꾸벅꾸벅 졸며 차를 꽤 오래 타면 시골 할머니 댁에 도착한다. 언제부터 기다리신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은 대문 밖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중이 보이면 벌써부터 ‘할아버지~ 할머니~’하며 부르고 싶어 졌다.


정겨운 시골 풍경 뒤로 반가운 할아버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주름과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 보이고, 거친 손이 느껴진 포옹과, 그 안에 담긴 포근한 냄새가 차례로 우리를 반긴다. 새 옷을 자랑처럼 선뵈며 이러쿵저러쿵 할머니께 뽐내면 우리 강아지라며 그냥 웃어주신다.


엄마와 작은 엄마는 음식 준비에 바쁘고 우리와 사촌 동생들은 나가서 논다. 냇가 산책을 가보고 도랑다리에도 가보며 샘물은 물이 나오고 있는지 살펴본다. 눈이 남아 있는 곳에 내 발자국을 남겨보고 강아지 발자국도 찾는다. 봄을 기다리는 언 흙만 남은 논과 밭도 굳이 걷는다. 처마 밑 고드름을 따서 차가움을 참아가며 석영 싸움도 해본다. 콧물이 나고 볼이 새빨개지고 발이 시리지만 더 놀고 싶다.


오랜만에 먹는 명절 요리는 마냥 들뜨며 즉석에서 손가락으로 맛보는 재미가 있다. 지글지글 전 부치는 냄새와 특별한 날만 먹을 수 있던 갈비찜이 있다. 당면을 삶아 체에 밭쳐 식힐 때부터 한입 먹고 싶은 잡채와 매콤하고 상큼한 오징어 숙회, 할아버지가 특별히 좋아하신 김밥도 돌돌 말린다. 커다란 교자상을 놓고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함께 식사하면 어느덧 시골 밤은 칠흑같이 깜깜해진다. 아궁이에 있는 숯이 아직 불을 품고 있다. 빨간 불과 회색 재, 까만 숯이 하나의 몸이 되었다.


할머니는 화로에 있던 재를 버리시고 새 숯을 담아 안방에 올리신다. 가끔 생선과 더덕을 굽는 구멍이 송송 뚫린 조리 도구를 가져오셔서 아까부터 있던 길쭉한 가래떡을 구우신다. 가래떡 겉이 노릇하게 익으면 한번 말랑말랑 만져보고 조청을 찍어 한입 크게 먹는다. 밖에 놔두셔서 살얼음이 동동 뜬 식혜와 함께 먹으면 겨울의 추위가 반갑다.


사랑방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깔린 두꺼운 이불을 차지한다. 차가운 두 손부터 먼저 넣고 어느새 따뜻한 이불에 누워있다. 은은한 메주 냄새가 어느 순간 정겹고 벽지의 무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숫자를 세다 보면 잠이 솔솔 온다. 어른들의 두런두런 말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바닥이 너무 뜨거워 깨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한밤중이다. 다시 잠을 청하고 눈이 떠지면…


살짝 열린 창호지 바른 문 사이로 추운 바람이 들어온다. 이제는 또 알 것 같은 엄마의 기상 시간을 인지하고 부엌의 세간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소고기 뭇국 냄새가 올라온다. 일어나기 싫다. 따뜻한 방바닥에 붙어 잠을 더 자고 싶지만 일어나야만 하는 손주의 의무에 양말을 주섬주섬 신고 세수도 안 한 채 차례를 올린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를 올리고 덕담과 용돈을 받는다. ‘이번엔 뭘 살까?’ 집에 돌아가면 문구점에 갈 생각만 하며 또 상다리 부러질 것 같은 아침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추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보지 못했던 차들이 어느새 많이 도착해있다.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외갓집에 가야 한다고 서두르고 짐을 싸서 다시 차에 오른다.


시골 마을을 달려 두 고개를 넘으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엄마의 친정이 있다. 우리의 외갓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 보였다. 먼 곳에 사는 친척들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부모님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세배를 올린다.


우리 가족은 후한 대접을 받으며 ‘이거 먹어봐라, 저거 먹어봐라.’ 하시며 다양한 반찬이 내 앞으로 온다. 평소 우리 집에서는 먹지 않는 반찬과 간식이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는 것 같다. 밥을 먹다 보면 이모네 식구가 도착하고 엄마의 사촌이라는 아저씨들이 여러 친구들을 데리고 손님으로 방문하신다. 몇 번이나 내 이름을 얘기하고 우리 엄마는 누구시라며 소개하는 시간을 보낸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둘러앉아 윷놀이하고 TV를 보고 아기 사촌들도 신기하게 바라보면 해가 뉘엿뉘엿 진다. 또 저녁을 먹었을 것이고 하룻밤 잠을 잘 잤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려 집에 도착하면 내 어린 시절 몇 번은 반복한 명절 여행은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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