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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원 Oct 09. 2023

나의 종교는 천주교

세례를 받고 나서 열심히 봉사하기까지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를 따라 성당에 나가면서 부모님이 안 다니니까 세례 받는 때만 되면 빠지게 되고, 같은 반에 세례명이 엘라라고 불리는 친구가 있었다.

나도 받고 싶다 생각은 했지만 어쩌다 한 번만 따라가게 되었던 성당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교회에 다녔다. 

금오공고나 전자공고 학생들이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는데 어느 날 동생이 언니야 신일교회에 아빠 닮은 오빠가 있어라고 하는 말에 가게 된 교회였다. 어쩌다 학습세례도 받고 유아를 교리 하게 되기도 했다. 

예배가 끝나면 남학생들이랑 금오산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재미있게 다녔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 방학 때였다.

할머니 친구분이 몸이 아파서 주말에 그 집에 가서 도와드렸는데 할머니가 신심도 깊고 봉사하는 맘이 크신 분이셨는데 우리 할머니와는 전혀 다른 분이었다. 그 할머니가 성당에 나오라고 해서 생각해 본다고 말했고, 나가게 된 계기가 아마도 그 할머니의 신심과 봉사하는 삶이었다고 본다.

엄마도 신자가 아니었기에 엄마 우리 성당에 다닐까? 같이 교리를 받고 대학 1학년때 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다니게 되었다. 함신부님께서 세례를 주셨고, 혼인성사도 해 주신 신부님이다. 

후임 신부님으로 허신부님께서 오셨는데 당시 성령세미나를 받아 은혜를 받게 되었고, 열심한 신자가 되기로 다짐을 하고 청년 레지오도 했는데 서울로 가는 바람에 멈칫하게 되었다. 그래도 잠실 성당에는 가끔 주일미사를 다녔다. 

그러다가 구미로 내려와서는 임신 상태라 창피해서 쉬었다. 

광주로 발령이 나고 그곳에 살림 나면서 상무대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견진성사도 받게 되었다. 

독서를 처음 하던 날 얼마나 떨었는지 빨리 읽고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뿐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성령기도가 왕성했었고, 여기저기서 성령 받아 은혜가 많다는 분들이 있어 엄마가 광주를 자주 왔었고, 같이 기도하러 다니곤 했다. 위층에 신자가 살아서 신세를 지고 했다. 어느 날은 저녁 미사에 갔다가 마치고, 사모님들이랑 신부님 차를 타고 화순으로 넘어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 집에 늦게 들어왔더니 남편이 화가 나서 쫓아내는 바람에 위층에 가서 자기도 했다.

애기를 두고 나갔으니 얼마나 열받았는지 이해는 하지만 그렇게 쫓겨나고, 부부싸움도 잦고 늘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다음날 집에 들어가니 나의 성물들이 성모상과 십자가, 예수성심상까지 전부 부엌 바닥에 깨져있고, 성경책은 찢어지고 이건 완전 박해였다. 보따리 싸서 살지 않겠다고 애를 업고 친정으로 갔다. 시댁 식구들이 와서 이러면 안 된다며 꼬드겨 다시 광주로 가서 살게 되고, 이후론 싸움을 하면 성물부터 챙겨서 가방에 넣고 애짐까지 챙겨 양손에 가방을 들고 애를 둘러업고 친정으로 갔다. 수시로 싸움하게 되고, 살기 싫을 때가 많았다. 

어디를 가도 성당이 먼저였고, 봉사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김해 공병학교 성당은 토요일에 미사가 있었다. 송정해수욕장으로 여름에 해수욕도 갔었다. 동현이 세 살 때라 바닷물이 무서워 들어가지 못하고 엄마 이리 와하며 불러서 치마 입고 물에 빠졌던 일도 있었네요.

경기도 광주성당에서는 송정리 2 반장도 했었어요. 반모임을 밤에 하니까 각 가정에 다니며 모임하고 나면 음식 나눔도 했었는데 정이 넘치는 구역 반모임이었지요.

인천 부개동 삼마성당은 몇 번 가지도 못했습니다. 아들이 백혈병에 걸려서 초반에 세 번 정도 이후는 주말마다 병원을 가야 했기에 대구로 내려가느라 성당엘 못 갔어요.

대장동에서 살 때는 집이 산속에 있는 관사여서 밤에 나다니기가 무서웠다.

반모임을 하면 우리 집에서 할 때 반장인 요셉 어머니가 반원들 모시고 오기도 했다. 나 또한 반모임을 하러 나갔다가 오곤 했는데 밤에 위병소에 보초서는 사병들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들어서기가 주춤했던 날들도 많았지. 

능곡성당에는 신부님이 연세 있으셔서 정석대로 미사를 집전하셨어요. 부활성야미사를 밤 10시에 시작해서 거의 12시까지 하고 들어갈 때도 있었다. 

요셉이 엄마가 우리 구역 반장이었는데 참 잘 챙겨주었다는 기억이 있다. 아담한 전원주택에서 살았는데 이 집에서 반모임하면 우리 아들 동현이 제일 좋아했었다. 강아지도 있고 마당이 있어서 갖가지 동물들이 있었거든요.

우리도 요셉이네서 강아지를 분양받아 기르기도 했고, 병아리도 키워 닭이 되어 알을 어디다 낳는지 몰랐는데 어느 날 산기슭 나무사이에 알이 잔뜩 있어서 가져오니 아래에 있는 것은 삭아서 못 먹고 위에 있는 것만 먹었던 일이 있었고, 닭이 우리 동현이를 따라다니며 엉덩이를 쪼아서 울었던 기억 도나고, 입학을 대장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초반에는 청소를 엄마들이 해서 매일 가서 청소했지요. 그러다가 자전거를 사주고 혼자 학교에 가게 했는데 어느 날 자전거에서 넘어져서 다리며 팔꿈치며 온통 피가 나고 아파하며 왔는데 애가 어떤지는 묻지도 않고 자전거 부서졌다고 나무랐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부모교육을 받지 않아서 몰랐던 것이라 미안함 마음이 지금 드는 것은 뭘까?       

광주성당을 다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우리 동현이 첫 영성체를 했답니다. 아이가 교리 받을 때 부모교육을 안 빠지고 나갔어요. 

아들이 초등학교에 전학을 오고, 동생을 업고 청소하러 학교에 다녔을 때 담임 선생님도 성당 신자임을 알았고, 반모임을 할 때 우리 집에 초대해서 같이 반모임도 가졌다. 100년 성당을 짓는다고 퇴촌에 터를 닦는다며 모금도 했고, 가서 기도도 한 기억이 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가보고 싶네요.     

육군대학성당에서는 레지오도 하고, 성가대도 했어요. 레지오 교육을 받으러 간 적도 있었네요.

상무대성당에서도 반장을 시켜서 흔쾌히 승낙을 했지요. 어디든 가면 봉사는 할 수 있으면 했어요. 그런데 이곳에서 아들이 백혈병이 재발되어 힘든 나날을 보냈네요. 기도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인지 죽을 수 있다고 했지만 수술도 빨리 받을 수 있었고, 병원비도 상무대의 보병학교와 여러 곳에서 도움을 주셔서  IMF로 힘들다고 하는 시절이었는데 병원비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육군대학성당으로 다시 오게 되었고 6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화천의 칠성성당으로 이곳에서 제일 재미있게 보낸 거 같아요. 주일이면 성당에 가서 미사 마치면 신자들과 식사도 하러 가고, 마지막주는 커다란 들통에 일품요리 하는 날로 카레나 짜장, 아니면 소고깃국을 끓이든지 밥봉사했고, 직분을 맡아서 딸기잼이나 김, 매실진액, 깻잎김치를 사서 팔아 수익금으로 사병식사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어요. 그땐 왜 그리 잘 팔았는지 사업부장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내장사는 완전 꽝이에요. 비수구미 가서 통돼지 바비큐 먹기. 얼음 위를 썰매를 타고 들어가서 놀다가 오기도 했던 기억들 칠성성당에서는 전성시대였네요.

춘천으로 이사 나오면서 우두성당을 다녔는데 부대 성당을 안 가고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녔는데 여기서는 처음에는 일주일에 하루만 제대봉사 해달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는데 한 사람이 빠지고 대신 맡아서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빠지고, 또 맡아서 하고 그러다 일주일 전체를 맡게 되었어요. 그때는 아들이 복사도 서고, 성당에 가자면 잘 따라오고 이쁜 짓을 했어요. 새벽복사 서다가 낌새가 이상해서 보니 발을 꼼지락꼼지락 하다가 오줌 싸기도 했고 신부님이 혼내지 말라고 하셨지요. 신앙생활을 제대로 배우고 원칙대로 하는 건 우두성당에서 제대봉사하면서 많이 알게 되었지요. 제의를 세탁하고, 다리고 하는 것이 하나하나가 기도였어요. 미사 전 제대 준비하고 마치면 정리하고 하루가 성당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정도. 신부님께선 고해성사를 자주 보라고 하셨기에 아마도 그때 제일 자주 본 것 같아요. 에피소드라면 부활성야미사에 십자가에 보라색 천을 걷지 않고 미사를 했다는 거 얼마나 창피했든지 신부님께서도 난생처음 십자가에 천 씌우고 미사 하셨다며 웃으셨지만 얼마나 한심했을까요? 부활이 지나면 엠마오라는 행사가 있는데 카니발을 타고 있던 때라 차량봉사했지요. 신부님 세 분과 봉사자, 식봉사자매님까지 태우고 동해로 가서 회 먹고, 구경도 하고 왔지요. 

어쩌다 구미로 봉곡성당에 오기까지 20여 년을 객지로 다녔네요.

전역하고 구미에 오니 왜 그리 어색한지. 성당을 지어야 하니 신부님과 사목임원들은 매주 모금하러 타성당으로 다니시고, 우리 성당엔 대리구에 계신 신부님께서 오셔서 미사를 들려주시곤 했어요. 문구점 하는 동안에는 성당에 몸으로 봉사는 못했어요. 그러다가 그만두게 되고 직장을 다니고, 서울로 가게 되면서 미사를 빠지게 되었고, 쉬는 교우가 되었어요. 

다시 시작하게 된 게 소피아가 첫 영성체교리를 하게 되면서였어요. 매주 부모교육이 있기에 참석해서 다른 엄마들과 교류도 하며 지내다 보니 자모회장을 맡게 되었고, 2년을 봉사하게 되었어요. 구역장에 레지오 서기도 하였네요.

그러다가 꾸르실료 교육받으면서 울뜨레아 총무도 하였지요.

남편이 치매가 되면서 다 내려놓았어요. 연차 총 친목회 마치고 나오는데 앞에서 씩씩대며 기다렸다가 폰을 뺏어 바닥에 내동댕이치질 않나 성당신자들이 보는데 얼마나 창피했던지 성당 나오지 말까 생각도 했지만 사람 보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러 가기에 얼굴에 철판 깔고 계속 다니고 있지요.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간만 나면 미사에 나가요.

본당활동 내려놓은 대신에 성당 주변의 쓰레기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줍게 되었어요. 담배꽁초 주우면서 담배 피우는 내 아들이 건강하기를 쓰레기를 주우며 남편의 치매 진행속도가 이대로만 멈춰주기를 기도하지요.

메타버스에 푹 빠지면서 기도생활이 멈췄어요. 레지오 할 땐 보고하기 위해서라도 의무적으로 묵주기도를 했는데 이젠 시간만 나면 폰을 보게 되니 부끄럽지요. 차를 타고 나가야 묵주기도를 하게 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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