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문동은이 고등학생으로서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해는 2004년이다. 2004년이면 내가 중3. '왕따'가 들불 같은 기세로 유행할 때다. 같은 세대인데, 문동은이 당한 일은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현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왕따는 드라마처럼 치밀하게 짜인 악의의 거미줄이라기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피해가기 어려운 유행이었다는 점.
예를 들어 내가 아무리 K팝을 싫어하고 올드팝만 좋아한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상점가에서, 식당에서, 대중교통의 라디오에서 너무 많이 흘러나와서 안 듣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 K팝이고, 유행이다. 그 시절 대부분의 왕따도 그런 것이었다.
더 글로리의 포스터나 오프닝은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와 상당히 유사하다. 김은숙 작가가 복수극을 표방하면서 일부러 차용한 모티프 같다. 심지어 주연인 송혜교의 연극적인 말투도 금자씨(이영애)를 연상시킨다.
다만 친절한 금자씨 수준의 풍요로운 미쟝센과 영화적 표현, 정교한 강렬함을 기대하면 안 된다. 친절한 금자씨가 B급의 탈을 썼을 뿐 제대로 완성한 연극적 영화였다면 더 글로리는 그냥 잘 만든 B급 드라마다.그러나 잘 만든 B급은 언제나 가장 대중적이다. 대중예술은 대중적이어야 한다. 왕따가 그냥 유행이라서 유행하며 어느 순간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되었듯이, 더 글로리는 대중의 입맛에 맞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허술한 설정과 스토리조차 대중의 힘을 빌려 구멍을 메우며 거침없이 달려나간다.
허술하고 현실적인, 과장되고 적당한
1, 2화가 너무 잔인하다는 평이 있지만 실제 학교폭력은 저보다 더 잔인한 사건이 많았을 것이다. 꼭 형사고발이 들어가지 않은 학교폭력도 그랬다. 내 기억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약하고 지저분해서 '왕따'였던 남자애를 다른 남자애들 그룹이 운동장에서 같이 축구하는 척 계속 공으로 맞춰서 결국 안경을 부러뜨리거나 교실 뒤에서 '왕따' 여자애를 남자애들이 붙잡아놓고 구타해서 팔을 부러트리거나.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그 시간대 그 현장에 있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운동장 한복판에서, 교실 한구석에서 그렇게 대단한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나머지 인원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굳이 모른척한 것은 아니었고, 남의 그룹이 노는 일상에 관심 줄 이유는 없었다.
울부짖는 소리,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터져나와도 남자애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고, 여자애들은 교실에서 소그룹을 만들어 수다떨기를 멈추지 않았다. 소리는 무슨 번개도 아닌 것이 순간 번쩍했다가 다음 순간 사라졌다. 폭력사태가 끝나고 나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가해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들어갔다. 피해자는 덩그러니 남아 있다가 어색함과 이질감을 뒤집어쓰고 자기 자리에서 쪼그라들거나 화장실 같은 피난처로 스며들어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피해자는 귀신같이 가정이 박살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싸워줄 보호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같은 세대라면 잘 생각해 보시길. 한 반에 한 명 이상 '왕따'들이 있었을 것이다. 전국의 모든 교실에 범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 매일 발생했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더 글로리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에 허술하기 그지없는 설정과 전개를 갖고서도 가장 현실고증에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작품에서 개연성을 굳이 정교하게 얽어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우리는 그런 현실을 살았다. 뼈대만 있으면 살은 각자 자신의 경험에서 자아낸 실로 휘감아 붙이면 되는 것이다. 과외 수입이 (심지어 불법일지라도) 세면 얼마나 세서 집을 사겠는가. 그걸로 월세도 내고 먹고 살고 입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합의금은 또 얼마나 많이 받아낼 수 있기에.
실제 세계에는 합리성이라는 것이 있다. 미성년자의 욕설과 성희롱에 대한 합의금으로는 수천도 무리다. 가해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문동은에게 약점 잡힐 일만 쏙쏙 골라 했는지, 그것도 생각하면 우습다. 작품 내 최강자로 등장하는 하도영(악역 박연진의 남편)은 어떻게 또 문동은에게 반할까.
그래도 이 드라마에서는 문제 없다. 아니, 드라마는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구름 위의 높으신 분께 감히 복수의 'ㅂ'라도 그려보겠나. 그건 시청자 모두의 판타지다.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대중작품은 훌륭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판타지를 채워주는 데 특화돼 있다. 과장되고 비현실적일 만큼 선명하지만 목적에 부합한다.
외환위기 직전에 등장한 '왕따'라는 말
'왕따'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신문에 등장한 시점은 1997년 3월이다(동아일보). 요즘 청소년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88년 11월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따돌림을 시킨다는 데까지 현상이 진화됐다. 어른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것을 당시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 피해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의 문동은은 기대를 해보았으나 처참하게 배신당했다. 현실에서는 드라마처럼 처절하게 배신당하기보다는 그 비겁함에 실망하게 된다.
1997.03.27 동아일보, 1998.11.30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기억을 되살려보면, '쟤는 왕따니까 그래도 돼'가 아니라 '쟤는 왕따니까 우리가 괴롭혀야만 해'라든가 '왕따가 없으니까 얼른 한 명을 왕따로 만들자' 같은 의무감이 학교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이를테면 프로포즈라고 한다면 우리는 남자가 반지를 내밀며 반무릎을 꿇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당연해서 프로포즈를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다.
왕따도 그렇게 의무감마저 느껴지게 만드는 사회적 룰이었다. 일단 교실 밖에서 뛰어놀기가 쉬운 시절도 아니었고, 돈 없이 건전한 유흥을 즐길 공간도 없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왕따' 시키지 않으면 놀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가학성 말고는 재미라곤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서, 도대체 뭘 하면서 서로 친해져야 할지 모르는, 그런 일.
교사들은 그런 일에 개입하기를 두려워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생명력과 에너지 넘치는 10대에게는 약간의 광기가 서려 있다. 그 광기를 휘어잡고 압도할 자신이 없다. 그럴 수 있는 힘을 갖춰야 '진짜 어른'인데. 우리 사회가 '어른'이 그렇게 흔한 사회인가? 대다수의 어른은 (아마도 나를 포함해서) 더이상 어린 상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한 주제에 그렇다고 제대로 발효하지도, 숙성되지도 못해서 군내 나게 익어버린 음식쓰레기일 뿐이라서. 어른은 내가 예전에 잃어버린 힘을 마주하면 한없이 회피하고 외면하고 싶다.
1997년 이전에는 왕따가 없었을까? 최소한 피해자가 왕따라는 라벨이 붙어 특정지어지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보도를 살펴보면 1980년대에는 일본 학원계의 이지메 현상이 몇 번 보도된다. 1995년 정도가 되면 일본의 이지메 현상이 굉장히 크게 보도된다. 재일동포가 겪는 '이지메'도 지적된다. 그 후에는 우리나라 PC통신에 일본의 이지메 현상이 나타났다는 보도가 눈에 띈다. 1996년에는 '한국판 이지메'가 등장한다. 그러고 1997년, '한국판 이지메'는 '왕따'라는 이름을 얻는다.폭력은 이름과 함께 영구한 생명력도 얻었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은 어떨까?
영화 '친구'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은 곧바로 조폭과 연결된다
학교폭력에 대한 보도는 1980년대부터 1990년까지 10년간 매년 수백 건씩 보도됐다. 그런데 양상이 좀 다르다. 학교 주변의 폭력배나(사실상 조폭 이야기다) 아예 어둠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불량써클이 학교폭력의 주요 주제다. 그러다가 1992년, 1993년이 되자 학교폭력이라고 불리던 미성년자 조폭에 대한 관심은 싹 사그라든다. 1990년 10월 무슨 일이 있었냐면, 노태우의 10·13 특별선언이 있었다. 소위 '범죄와의 전쟁'.
1980년대까지 한국 치안은 그만큼 막장이었다. 이후 조직폭력배가 싹 소탕되면서 한국 조폭은 기업형으로 진화했다. 어쨌든 초등중학교에서부터 조직원 새싹을 데려가던 기존의 피라미드 조직은 이어가지 못했다. 학생들의 세계도 달라졌다. 1980년 남성 74.4%, 여성 62.2%던 고등학교 취학률은 1990년, 남녀 합해 95.6%로 높아졌다. 물론 지방에서는 문화지체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의 '진짜'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 아이들의 폭력이 싹텄다. 싹은 일본을 모방하며 자라났다. 왕따 형태는 일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당시 사회 모든 면에서 우리는 일본을 많이 따랐다. 양지로 음지로 들어온 일본 문화는 고급스럽고 세련되며 따라하고 싶은 스타일로 받아들여졌다. 이지메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회현상을 분석한 논문을 찾아봐도 이지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폭력이 형태를 갖추는 데 일본을 모방했을지언정 폭력은 언제나 그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폭력 자체에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교도소에서, 군대에서, 거리에서, 부모에게, 교사에게, 상사에게, 선배에게 몇 대 얻어맞는 것은 스몰톡 소재도 못 되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왕따'로 가지치는 게 뭐, 얼마나 특이한 일이라고. 무서운 형님이 교문 밖에서 휘두르던 주먹을 내가 교실 안에서 휘둘러보고 싶어진 건 당연하다. 외환위기로 사회의 온갖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우울한 어른들과 방치된 아이들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폭력에서 달콤한 위안을 얻었다. 달콤함의 재료가 되었던 피해자들은 영혼 한구석에 영원히 풀리지 않은 피멍을 갖고 있을 테고, 더 글로리는 그 피멍에 연고를 발라주고 있다. 나름대로 학교폭력에 대응해 보겠다고 이런저런 제도를 갖춘 지금도 정순신 사태 같은 것이 벌어지는 마당이라, 더욱더.
이제 며칠 후면 더 글로리 시즌2가 방영된다. 구멍을 애써 메우려고 하기보다는 지금까지처럼 거침없이 달려나갔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개연성과 통쾌한 복수극이다. 어떻게든 납득해주려고 벼르는 대중을 빽으로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스한 개새끼'도, 태어나길 무죄로 태어난 연진이도, 빵부스러기 약간에 기꺼이 영혼을 판 가난한 노예들도, 다 멋있어. 다 말라 비틀어지게 해줘. 모두가 문동은의 성공을 바란다. 용서 없는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