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야, 너는 글을 왜 쓰니?

글에 대한 횡설수설

by 현우주


나는 왜 쓰는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언젠간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단순한 질문이지만 답하기는 쉽지 않다.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돈이나 명예 같은 단어가 떠오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오히려 펜을 잡지 말아야 할 이유밖에 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 이상 글을 써서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다. 20세기 초 작가들의 고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방황하는 동시대 작가들을 위해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작가의 동기(Motivation)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외한다면, 나는 작가들이 글을 쓰게 되는 데는(산문 작가의 경우) 네 가지 큰 동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동기들은 작가에 따라 그 각각의 정도가 다르고, 동일 작가의 경우에도 그가 사는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각개 동기의 비중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네 가지 동기란 이런 것이다.


(1) 순전한 이기심(Sheer egoism)


순전한 이기심은 한마디로 ‘뽐내고 싶은 욕망’이다. 남들 앞에서 뭔가 있어 보이고픈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마침 글은 이런 허영심을 채워 주기에 제격인 도구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글은 퇴고에 의해 완성되며 퇴고에는 제한 시간이 없다. 즉,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누구나 멋들어진 글을 쓸 수 있다. 밤새 머리를 쥐어짜며 고친 글이라도 일필휘지로 쓴 것처럼 행세하면 그만이다. 둘째, 우리는 글이 그 글을 쓴 사람의 생각, 더 나아가 그 사람 자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글을 쓴 사람은 실제로도 훌륭하다고 믿는다. 유명 인사들이 대필을 쓰는 이유도 글과 정체성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필력이 달린 탓에 실제의 모습보다 부족하게 보일까 두려운 것이다. 정리하면, 누구나 노력하면 멋있는 글을 쓸 수 있고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몇 해 전 '스피드 책 쓰기' 인기를 끈 적 있다. 일반인들에게 몇 주 만에 책을 뚝딱 찍어내는 비법을 전수한 한 강사는 “책을 내는 순간 사람들이 당신을 전문가로 대우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망. 이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 진지한 작가들은 대체로 저널리스트들보다 더한 허영과 자기중심주의를 갖고 있다. 돈에 대한 관심은 덜 할지 모르지만.


대체로 시인과 소설가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소설가나 시인이라 하면 비 오는 날 대청마루에 앉아 몽당연필로 원고지에 글자를 꾹꾹 눌러쓰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이들이 남들보다 더 큰 허영에 사로잡혀 있다니 혹자는 그들의 순수한 동기를 왜곡하지 말라며 반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웰이 말한 허영과 자기중심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인정 욕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순전한 이기심에서 우러나오는 동기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으며 남들이 그런 동기를 가지고 글을 쓴다고 해서 함부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


Hemingway.jpg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2) 미학적 열정(Aesthetic enthusiasm)


글의 미학, 즉 글이 아름답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먼저는 글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글이 '어떻게 보일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작가는 글의 내용이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만 고민하면 됐다. 하지만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등 사진과 영상이 주를 이루는 매체들이 발달하며 글의 완전한 소비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사람들이 긴 글을 읽지 않으며 글의 내용보다도 모양이 더 중요해졌다. 현대인들의 독서 패턴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보통 첫 문장, 글의 폰트, 문단의 두께를 F자로 짧게 훑고 읽을지 말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작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작품은 순식간에 소비되고 잊히고 만다. 그리고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 독해가 사라진 시대 속 자신의 글이 어떤 의미로 가닿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사라지고 있다. 글이 가진 묵직함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kids-1639351_1920.jpg 글과 그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다음은 문장의 아름다움이다. 글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인 동시에 자신이 느낀 감정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문장에 대한 욕심은 작가라면 한 번쯤 가지게 되는 동기이며, 작가를 작가답게 만들어주는 동기라 할 수 있다. 최근 소설을 읽다 아름답다고 느낀 문장을 소개한다. "어머니는 봉투에 26만 원을 넣어주었다. 20만 원도 30만 원도 아니고 25만 원도 아닌 26만 원이었다." (장강명-열광금지, 에바로드) 형편이 어려운 어머니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문장이다. 보기 좋게 나누어 떨어지는 25만 원, 그 위에 얹은 만 원짜리 지폐에는 어머니의 고민과 결단이 실려있다. 한편 문장의 아름다움은 소설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비문학의 문장도 아름다울 수 있다. 간결하고, 의미하는 바를 명쾌하게 전달하는 문장, 깊은 통찰이 담겨있는 문장은 아름답다. 특히 전직 판검사의 글이 그렇다고 느낀다.


"사실 의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의지란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대부분은 열 가지 여건이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연한 행운을 마치 노력의 대가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동원하는 말이다."

김웅 <검사내전> 中


(3) 역사적 충동(Historical impulse)


오웰은 역사적 충동을 사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두려는 욕망으로 정의했다. 후대를 위해 기록하려는 욕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동기지만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연예인과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보다는 연예인과 만났다는 증거를 남기는데 시간을 쏟는다. 단지 역사적 충동을 해소하는 도구가 글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cell-phone-791225_1920.jpg 기록이 간편해지며 글은 성찰의 도구로 변했다


글의 트렌드는 변했다. 우리는 이제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펜을 집는다. 기록보다는 탐구의 기능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중국 작가 위화는 “쉬지 않고 글을 써야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으며, 영국 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글을 쓰는 것은 정확한 인간을 만든다”고 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만약 오웰이 환생해 에세이를 다시 쓴다면 역사 대신 성찰(Reflection)에 대한 충동을 말하지 않았을까.


(4) 정치적 목적(Political purpose)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있어도 무관한 사람은 없다. 정치는 사회를 바꾸는 일이고, 사회는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땅에서 수십 년간 발붙이고 살아갈 우리 청년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정치를 입에 담지 않는다. 시국을 논하는 일을 상스럽고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 SNS의 발달로 어느 때보다 목소리를 내기 쉬운 시대에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막말과 실언을 일삼으며 정치를 상스럽고 부끄럽게 만들어버린 탓아닐까. 우리가 정치와 멀어진 만큼 어른들의 사회는 견고해졌다. 젊은 목소리의 부재 속 사회는 변화의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로 인해 나타날 부작용은 다시 우리가 떠안아야 한다.


‘정치적’이란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오웰은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말했다. 모든 견해는 정치적 태도이며,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견해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글은 반드시 그러한 글쓴이의 의도를 담아낸다. 신문기사나 설명문도 마찬가지다. 문단을 어떻게 배치하냐, 어떤 단어를 언제 쓰냐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주관이 담기게 된다. 따라서 글을 쓸 때는 먼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목적지 없이 걷는 것처럼 무의미하며 혹 필력이 좋다면 눈을 가리고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위험하다.


nhs-5083052_1920.jpg 어떤 글도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네 가지 동기를 말했다.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이중 당신이 글을 쓰는 동기는 무엇인가. 내게는 '순전한 이기심'이 주된 동기다. 자존감이 낮고 항상 남들의 인정에 목말라 있다. 뭐라도 있어 보이기 위해, 그렇게라도 자존감을 충전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 같다. 반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동기는 '정치적 목적'이다. 정치는 사회를 바꾸는 일이고,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가 살아갈 공간을 만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며 올바른 정치적 목적을 다져나가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을 글쓰기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내 정치적 목적에 대해. 요즘 드는 생각은 이렇다. 우리 사회는 분명 나아지고 있지만 표현의 자유는 퇴보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미명 아래 다른 모든 가치들이 짓밟히고 있다. 올해는 유난히 독자들의 항의에 고개 숙이는 작가들이 많다. 대의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면 신상이 털리고 매장되고 만다. 자유의 탈을 쓴 억압의 시대에 작가들의 역할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믿는 옳은 방향이며, 글을 쓰는 동기다.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대중이 똑같은 의견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똑같이 행동할 때 전체주의의 폭도가 된다고 했다. 모두가 같은 목소리로 옳지 않은 생각을 강요할 때 합리를 좇으며 정도를 걸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펜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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