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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pont Aug 12. 2022

프랑스에서의 삶, 나의 이야기 - 001


블라디미르 : 고고, 그런 소리 말게. 내일이면 다 잘 될 거니까.

에스트라공 : 잘 된다고? 왜?

블라디미르 : 자네 그 꼬마가 하는 얘기 못 들었나?

에스트라공 : 못 들었네. 

블라디미르 : 그 놈이 말하길 고도가 내일 온다는 군. 그게 무슨 뜻이겠나?

에스트라공 :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뭐.

블라디미르 : 내일 같이 목이나 매세. 고도가 안 온다면 말이야.

-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중>



프랑스에 넘어와 산 지 벌써 2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처음에 넘어올 때만 해도 온갖 꿈과 상상, 그리고 희망에 부푼 가슴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푼 가슴은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쪼그라들어 버렸다. COVID-19는 그림자 없는 괴물처럼 순식간에 전 세계를 덮쳤고, 나도 그 손아귀를 피해갈 도리 없었다. 프랑스에 온 지 한 달 만에, 그리고 장장 반 년 이상을 나는 아내와 함께 파리 외곽에서 ‘말 그대로’ 갇혀 살았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창업 – 말은 거창하지만 타국에서 먹고 살 거리를 찾겠다는 것을 – 하려고 왔으나 모든 것이 닫혀버리고 말았다. COVID-19의 확산을 막고자 프랑스는 봉쇄를 선택했고, 아주 제한적으로 바깥 출입이 가능했다. 대규모의 실업과 폐업 속에서 새로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프랑스는 불만에 가득 찬 일거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재난지원금을 약속했으나, 우리에게까지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재난지원금은 적어도 2019년 12월까지 세금을 1회 이상 납부한 실적이 있어야만 신청 가능했다. 2019년 12월에 프랑스에 온 나와 아내는 당연히 세금을 낸 기록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뒤늦게 재난지원금을 주겠다고 나섰으나, 한국에서의 소득이 없었던 우리는 또한 신청할 자격을 갖지 못했다.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나와 아내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상태로, 어디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순수히 우리가 가진 돈으로만 버텨야 했다. 내일은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양치기 소년의 말이 내 말인 것인양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갔다. 만약 좋지 않다면이라는 가정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아니, 그런 불길한 가정을 따로 할 필요는 없었다. 매 순간 불길함은 우리의 가장 여린 속살까지 파고들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반 년을 어떻게 참고 버텼는지 모르겠다. 버틸 수 있었다는 것도 굉장한 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딱히 어떤 사건이 기억되는 것도 별로 없다. 왜냐하면 무언가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동허가증(Attestation de déplacement dérogatoire)을 쓰고 장을 보는 것 말고는 밖에 나갈 일 자체가 없었다. 아, 비자 발급받으러 이따금 낭테르 경시청(Préfecture de Nanterre)에 간 정도일까? 


<봉쇄 초기에는 이동허가증을 손으로 써서 가지고 다녀야 했다. 나중에는 온라인으로도 발급 가능했다.>


아직 백신도 맞기 한참 전이기 때문에 – 그 시기엔 백신 개발이 한창이었으므로 – 그 흉폭하다는 바이러스가 두려워 바깥 출입을 자제한 까닭도 있었다. 마스크조차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 답답할 때는 근처 공원에 우리가 직접 만든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손수건, 냅킨으로 급조한 마스크는 생각보다 착용감이 괜찮았다.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을 막아주기엔 부족했지만, 양쪽에 고무줄을 매달아 귀에 걸고 우리는 서로 마스크를 쓴 모습이 웃겨서 잠시 깔깔거릴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있던 공원은 참 아름다웠다. 햇살을 맞고, 바람을 쐬고, 하지만 푸르른 나뭇잎이 더욱 푸르러질수록 내 내면의 두려움은 더욱 선명해졌다. 마냥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돈 벌 구석을 어떻게든 찾아야만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 그때 약간의 기분전환을 위한 행위가 오히려 내면의 독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공원 한 가운데 있는 큰 나무. 한가로이 독서하며 쉬는 이들을 나는 한 없이 부러워했다.>


당시에는, 사실 무엇을 하든 그때만 조금 즐겁고 우울한 시간이 반복되었다. 우리가 살던 파리 외곽에는 식료품 대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비교적 싸게 빵과 샐러드, 햄을 살 수 있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근처 숲까지 걸어가 먹기도 하고, 황혼이 지는 자뜨 섬과 센느강변을 걷기도 했으며, 아주 이따금 샹젤리제 거리로 나가 거기에 있는 K-마트에서 간장, 된장, 고추장을 사기도 했다.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을 장보러 다니며 보다니,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그러나 내면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는 그 어떤 즐거움도 무의미했다. 집이 불타는데 당장 물 한 컵 뿌려봐야 소용없는 것처럼. 


<센느 강의 풍경은 아름다울 수록 나는 말을 잃어갔다, 아름답다는 말도 쉬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봉쇄기간 동안의 기억은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으로서, 이를테면 두려움, 공포, 절망감, 체념 등 부정적인 것들의 뒤범벅으로서 느껴진다. 위태로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체념하기를 하루에 열 두번씩 거듭하다 보니 아내와 다투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아내였으므로.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니까. 프랑스에 우리 둘이 왔고, 오로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는데, 슬프게도 서로의 분노를 표출할 대상도 우리 둘 각자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일까. 


봉쇄 시기, 프랑스는 국가적으로 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매일 저녁 8시에 사람들이 발코니로, 창문으로 나와 박수는 치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고생하고 있는 의사, 간호사, 관련 직종 종사자들을 위해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고, 누군가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 또한 손이 얼얼해질 때까지 힘껏 박수를 쳤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속의 번뇌들이 그렇게 하면 다 죽을 것같이 생각하며, 막 박수를 치고 나면 손바닥이 아주 빨갛게 부어올랐다. 신기하게도 손이 아픈 만큼 마음은 조금 후련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양 부모님들이 걱정하실까봐 연락을 드린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우리 또한 한국어로 속 편히 대화할 상대가 절실했다. 주말마다, 한 집당 거의 1시간씩. 두 집 모두 통화하고 나면 2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완전 기진맥진한 상태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무슨 할 이야기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장 보고, 무엇을 먹고, 프랑스의 코로나 상황을 중계하고, 한국의 상황 이야기도 듣고. 지금 생각해보면 양 부모님께 감사할 것이, 봉쇄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쓴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는 거다. 한국으로 돌아오란 말도 하지 않으셨다. 또 힘내라고 과하게 말씀하시지도 않으셨다. 그저 우리를 믿고 지지해 주셨던 것이다. 속마음은 얼마나 불안해하셨을까? 나와 아내는 이따금 그 때의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때 양 부모님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다. 


<스트라스부르 구텐베르크 광장의 회전목마. 시작하여 끝나기 전까지, 목마는 쉼없이 돈다.>


지금 나와 아내는 프랑스 동쪽 끝 스트라스부르에 와서 살고 있다. 여기에서 산 지 이제 2년 가까이 되었다. 파리에서 반 년, 스트라스부르에서 2년을 살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보고자 한다. 앞으로 살아가며 겪을 것들까지 포함해서. 내 삶을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쭉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판에 손을 올리기까지 2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내 마음의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기까지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도 때로 불안하고, 두렵지만, 이제는 즐거움, 평안, 위로 같은 감정들도 종종 피어난다. 황폐했던 내 마음 속에서도 이런 긍정적인 감정의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내 삶이 일종의 부조리극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고, 예상할 수 없는 것의 반복이며, 또 삶에 완성이란 없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도 끊임없이 결핍은 발견된다. 스스로를 바라보아도 그렇고, 남과 비교를 해봐도 그렇다. 나는 항상 부족한 사람이고, 결국 완성이란 없이 끝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창하게 완성이 아닌, 삶의 아주 찰나의 만족을 위하여, 아내와 함께 한국을 떠났고 지금 소소한 하루 소소한 만족을 느끼며 살고 있다. 이러한 소소한 만족을 얻기까지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지극히 우연한 기회들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면서 머릿속에서 사유했던 것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또한 이렇게 글을 쓰며, 나 자신을 다시 다잡기 위함이다. 소소한 만족을 위하여. 


내 삶의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고도가 온다는 설정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 그러나 내 삶에 장면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고, 이 장면들을 이어지게 했던 수많은 일들을, 그리고 그 장면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나가고 싶다. 내일 고도 비슷한 게 혹시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며, 어쨌든 나는 프랑스에서 쭉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에스트라공 : 고도가 오면?

블라디미르 : 그럼 사는 거지. 

-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중>



Le 12.08.2022

À Stras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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