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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Oct 23. 2020

<야구소녀> 영화를 빌려

야구소녀(2019)


토요일은 아버지가 유일하게 단장을 하시는 날이다.  특별히 아프신데도 없는데  매주 토요일마다  동네 한의원에 간다.  하루는 아버지가 한의원이 개원 3주년이 되었다고 케이크를  들고 가자 엄마는 생전 하지  않은 짓을 한다며 혀를 끌끌 차며 볼멘소리를 하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아내와 자식들 생일을 살뜰히 챙기시는 분은 아니었다.  그 시절 전후세대를 거친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럴 거다.  그렇다고 내  또래 친구들의 아버지들처럼 권위적으로 자식들을 대하는 분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강요하거나 심하게 혼을 낸 적도 없다.  내가 유년시절에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일에도 밤  11시가 돼서야 집에 오셔서 늦은 저녁을 때우시던, 주말엔 목욕탕을 가시거나 주말 오후 내내 낮잠을 주무시던 모습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에 치여 살던 모습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한의원을 가는 것 만큼이나 당시 늦은 야근을 자처하고 업무에 빠져 살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일견 이해가 간다. 가난한 유년시절을 겪으며 성장한 아버지 세대는 70-80년대 산업화의 일꾼으로 열심히 몸 바친 일한 만큼 따라온 경제적 풍요로 보상받았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꿈은 서울 여의도로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여의도의 증권회사에 취직을 하시고 결혼도 하고 서울에 본인 명의의 집을 장만하셨다. 학비가 없어서 낮에는 일을 하시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닐 만큼 열심히 살았던 아버지는 아마도 꿈들이 하나씩 이뤄지고 눈앞에 실현되는 그 맛에 신명 나게 일하셨던 거 같다. 실제로 평일 밤 야근을 마치고 온  아버지는 피곤에 찌든 모습이 아니라 성취감이 가득 찬 뿌듯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랑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주말 식사시간이었고 부부싸움의 단골 소재는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할 엄마의 책임추궁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내가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오니 애들 교육문제만큼은 당신이 알아서 책임지라고 했다. 일명 8 학군이라는 동네로 이사 올 때도 "다 너희들 학업 때문이야"라는 말 때문에 공부가 하기 싫다는 말,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좋아하는 게 뭐니?" "하고 싶은 게 뭐야?" 이런 말들은 그 시절 부모님들에겐 언감생심이었다. 6.25의 폐허 위에서 새로 나라를 재건해야 했던 부모세대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했고 그 수단으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난 그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꽤나 오랫동안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열패감과 부채감을 가지고 살았다. 1998년, IMF가 터지고 많은 사람들이 대량해고를 당했다. 대기업 증권회사를 다니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출근을 안 하셨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때 난 아버지가 퇴직을 당한 사실보다 집에 계시는 아버지가 낯설고 불편만 하기만 했던 철없는 스무 살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짜증을 많이 내셨고 항상 표정이 어두웠다. 난 그 모습이 아버지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난 아버지를 잘 몰랐고 알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르고 집안문제로 가족들끼리 언성이 오갈 때 아버지의 어떤 말이 처음으로  부모가 아닌 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때 힘들 때 누구 하나 날 위로해줬냐?"

그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그 말을 내뱉은 아버지가 민망할까 봐 우리는 서둘러 다른 대화로 넘어갔다. 어쩌면 아버지가 처음으로 가족에게 속마음을 드러냈을 그 순간조차 가족은 가장으로서 아버지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난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작아 보이는 키, 움츠러든 어깨, 얇아진 종아리, 유독 훵 해 보이는 정수리.

어딜 가도 남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시는 친절한 사람, 형제 친척에게 먼저 전화 걸어 안부를 묻는 따뜻한 사람, 친구들 모임에서 항상 궂은일을 맡으시는 성실한 사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어른.

엄마는 남한테만 잘한다고 웃으며 말하지만 하하.

침 몇 방 맞는 게 뭐 그리 효과가 크겠냐만은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 못해주는 걸 타인이 해주는 경우도 있다. 엄마 말로는 내 나이 또래의 여한의사가 동네 어른들에게 친절해서 사람들이 붐빈다고 한다. 이사를 오고 나서도 예전 동네 한의원으로 간다고 잔소리하는 엄마에게 난 몰래 눈을 찡그린다. 그날만큼은 아버지가 기분 좋게 다녀오시라고 전날에 차를 충전해놓는다. 당연히 약속도 만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빨리 결혼해서 며느리를 보여 드려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또 나 자신을 나무라지만 이제는 그런 부채감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


어린 시절, 명절 때마다 빠지지 않고 온 가족이 아버지의 고향인 대구로 차를 몰고 내려갔다. 나와 동생은 긴 연휴를 친구도 없는 대구에서 보내는 것보다 교통체증으로  8시간 가까이 도로에서 서다시피 가는 차 안이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있는 고향에 가는 길이 즐거우셨을 텐데 언제나 무표정으로 운전만 하셨다. 긴 긴 시간을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드디어 동대구 인터체인지가 보일 때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훈아의 "고향역"을  틀었다. 큰아버지댁에 도착할 때까지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큰아버지도 돌아가신 대구에는 이젠 내려가지 않는다.

조용히 가족끼리 보내는 추석 어느 날 밤, 우연히 거실에 물을 마시러 나갔다가 본 아버지의 표정에서 20년 전 동대구 인터체인지 앞에서 "고향역"을 들으시며 운전을 하던 그때  표정을 봤다. 티브이에서는 "나훈아 쇼"가 방영 중이었다.

아마도 내가 본 아버지의 표정 중에서 가장 행복해하시던 표정이 아니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배우를 하겠다고 연극판에 갔을 때,

제일 반대하던 사람은 엄마였다. 이미 아버지는 퇴직 후에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잘 안되면서 자신감과 함께 집안에서의 위치도 작아져만 가실 때였다.

매일 아침 연기를 배운답시고 극단으로 출근하는 나에게 온갖 모진 말로 반대를 하실 때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작게 말씀하셨다.

"지가 하고 싶다는데 그냥 내버려 두어.."

아마도 강하게 말 못 한 이유는 책임질 수 없으셨기 때문일 거다. 가장은 책임지는 거라고 배우신 아버지는 수입이 끊기시자 목소리도 작아지셨다. 반면 엄마는 가세가 기울어지자 갱년기와 함께 화가 늘었다. 몇 번을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화병이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과 자식들이 제 마음대로 되지 못하니 가슴속에 화병이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엄마는 부산에서  잘 나가는 6명의 오빠 밑에서 부족함이 없이 자란  유일한 막내 여동생이었다.

아마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하신 것 같다. 뒤늦게서야 마의 성격을 이해했지만 그때는 엄마가 제일 원망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속의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소심한 성격 때문에 부모에게 한 번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부모의 입장에선 멀쩡하게 다른 과를 나와 다른 일을 하다가 27살에 배우를 하고 싶다고 했으니 당황했으리라.

대학로에서 첫 공연을 마치고 죽마고우 몇 명과 부모님이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날 부모님은 적잖이 놀라셨던 것 같다. 아들이 영화를 좋아하고 배우의 연기를 따라 하면서 친구들을 웃기고, 짧은 소설을 써서  보여줬다는 친구들의 말에  그런 쓸데없는 짓 하느라 성적이 그 모양이었냐는 핀잔 대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무 말이 없으셨다.

연극을 할 때 엄마가 나에게 자주 했던 말은

"너 연극배우 시키려고 그 고생을 하고 좋은 동네로 이사했는지 아니?!"

나는 한 번도 그 동네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고 공부 잘해서 성공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결국 집을 나와 배우 생활을 계속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연극배우를 하면서 제일 극복하기 힘들었던 건 생활고나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보고 듣고 살아온 삶을 전복시킬 용기가 없었다. 모든 걸 버리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갖고 있던 마음의 빚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 시절, 내가 부모에게 원한 건 딱 한 가지였다.

"잘하고 있어.. 힘들지?"

그저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는 것. 참 쉽지만 어려운 거란 걸 이제는 안다.


퇴직 이후에 아버지도 가족에게 이 말 한마디가  간절히 듣고 싶지 않으셨을까.

오늘도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단정히 만지시고 한의원에 가신다.



" 한 사람의 꿈은 단순히 한 사람의 꿈만은 아니다.

꿈이 이루어지기 까지 여러 타인이 개입된다. 가족은 그중에 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꿈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꿈을 이룬다는 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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