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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망트망 Dec 29. 2020

그냥 시작했어요, 일본어.

목적 없는 활동이 데려간 새로운 세계




왜 일본어야?


대학을 휴학했던 시기, 근황을 묻는 사람들에게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면 꼭 듣는 질문이었다.



그냥


이렇게 대답하면 열이면 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그냥이라는 대답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학점이나 취업에 필수인 영어 말고, 새로운 스펙으로 급부상하는 중국어 말고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미래에 도움이 될 테니까, 취업에 필요하니까, 시험 점수가 나와야 하니까, 이런 이유들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어랑 중국어 빼고 나니 그나마 흥미가 생기는 언어가 일본어였다. (그 당시 일본어는 취업 스펙과도 거리가 멀어서 인기가 시들해지는 시기였는데, 그래서 더 관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시작한 일본어였기 때문에 주변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 그럴 시간에 영어를 하는 게 낫지 않겠냐, 일본어보다는 중국어를 배우는 게 취업할 때 유리하지 않겠냐, 일본어를 배워서 어디에 쓰려고 그러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지만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시작했다.






공부의 가벼움



초중고등학교까지의 시간을 돌이켜보니 목표는 딱 하나였다. 대입. 국영수는 물론 그림 하나를 그려도 입시를 위한 활동이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을 하나의 목표를 보고 달려온 만큼 그것을 달성하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취업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또다시 전력 질주해야 하는 현실을 맞닥뜨리자 지쳐버렸다. 그래서 학업을 중단했고 그와 동시에 '목표'가 없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아무런 목적 없이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어는 나에게 산뜻하게 다가왔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우고 기본적인 표현을 익힌 뒤로는 일본어 공부를 핑계로 일본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하는 공부라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핑계였는데, 그렇게 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실제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입시나 시험이라는 목표가 없으니 공부하는 방법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못해도 된다는 자신감



일본어는 나에게 묘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잘해서 나오는 자신감이 아닌, '못해도 된다!'는 자신감이었다.

 

영어는 스펠링을 모르거나 발음이 유창하지 않으면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누군가가 중고등학교 때 뭐했냐고, 대학은 어떻게 들어간 거냐고, 대학생이 이 정도도 못하면 어쩌냐고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본어는 달랐다. '이제 시작했는데 뭐, 외국어잖아, 못하는 게 당연하지.'라는 생각에 못해도 당당했다.



그 당당함 덕분인지 일본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언어 교환(랭귀지 익스체인지)에도 뛰어들었다. 내가 일본어를 공부한다고 하니, 선배가 수업에서 알게 된 일본인 교환학생을 소개해 주면서 서로 언어 교환을 하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는데,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얼마나 일본어가 서툰지도 모를 정도로 초짜였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인 교환학생도 나만큼 한국어가 서툴렀다는 것이었다.


일본어 초짜와 한국어 초짜가 만나 시작한 언어 교환, 우리의 대화는 한마디를 넘기기 힘들었다. 대화하는 시간보다 사전 찾는 시간이 더 길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누군가 입을 열 때마다 사전을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언어 교환은 한 학기 동안 계속되었고, 학기가 끝나갈 즈음 서로가 서로에게 놀랐다. 대화가 한 시간을 넘어가는데도 테이블 위에 놓인 사전을 펼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시작한 공부가 데려간 새로운 세계



이렇게 시작한 일본어 공부는 나에게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대학에서 진행하는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했고, 교환학생에도 지원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일본에 있는 대학원에도 도전했다.


아마 일본어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교환학생은커녕 외국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한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험을 치르고, 일본어로 강의도 듣고 리포트도 써낼 만큼 열중했던 공부. 하지만 그것도 취업준비를 시작하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놓아 버리게 되었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내 말이 맞지 않냐고, 일본어는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고, 써먹을 데가 없다고.


하지만 나에게 일본어는 '스펙'으로 전락할 만큼의 작은 의미가 아니었다. 숨 막히는 현실에서 숨 쉴 구멍을 틔워 주었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어 공부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목표는 나를 원하는 곳에 데려가 줄 수 있지만, 목적 없는 활동은 지금의 내가 상상도 못 한 곳에 데려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일본어가 아닌 '목적 없는 활동'에 관한 글이라는 점을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알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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