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발리 비건 여행 ㅣ 프롤로그
해외여행을 상당히 좋아한다.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만 있으면 분기별로 나가고 싶을 정도. 그렇다고 여행을 좋아한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해외여행에 비해 국내여행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해외에는 있다. 길거리에 즐비한 간판이 뭘 뜻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느껴지는 생소함이 있다. 신호등에 그려져 있는 사람 실루엣이 미묘하게 다를 때 느껴지는 귀여움 따위가 있다. 어떤 음식이 나올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때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 음식이 생각보다 맛있을 때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감탄이 있다. 반대로 너무 맛이 없어서 입가에서 피식 새어 나오는 실소도 있다.
그들에게는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낯섦 그 자체일 때 그 간극에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크랙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공기의 맛 같은 게 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해외여행은 늘 갈망의 대상이었다. 휴가철만 되면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SNS에 올라오는 해외여행 사진을 보며 부러워했고, 각종 미디어에 나오는 해외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언젠간 나도 꼭 가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치고 나서 그 모든 것이 중단됐다. 해외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은 없지만 다 같이 못 나가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일은 없는 게 나은 건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면서도 언젠가는 나갈 거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는 게 나은 건지 알 수 없는 나날이 지속됐다.
그렇게 해외여행이 막힌 것도 1년 남짓, 작년부터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내 마음도 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다. 미션 클리어하듯이 일을 하나하나 쳐내며 달려야 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올해가 끝나기 전에는 낯선 공기를 마셔야겠다는 의지 같은 게 움트기 시작했다.
유럽은 예전부터 좋아했지만 비건을 시작한 이후로는 더 좋아하게 되었다. 비인간 동물의 지위가 높은 나라가 유럽에 많을 뿐만 아니라 비건 문화도 비교적 잘 정착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가야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유럽을 1순위로 고려했지만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어딜 가도 항공권만 백만 원 이상 + 물가가 원래도 비싼데 인플레이션 때문에 더 비싸짐)
그렇다고 물가가 저렴한 곳 아무 데나 갈 수도 없었다. 하루 두세 끼는 먹어야 하는데 비건 식생활이 정착되지 않은 곳으로 가면 정말이지 먹을 게 하나도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발리로 결정했다.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할 뿐만 아니라 어딜 가도 채식 옵션이 있어서 '비건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리고 발리는 12월이 우기인 데다 12월 초는 크리스마스나 연말과 겹치지도 않아서 비성수기에 가까웠다. 이 말인즉슨 숙소비가 비싸지 않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항공권인데, 코로나의 여파로 항공권이 상당히 비싸진 게 문제였다. 2022년 11월 기준으로 발리로 가는 직항 비행기는 대한항공밖에 없었는데 가격이 130만 원대였다. (지금 검색해보니 12월 중에는 200만 원 대도 있다...) 경유하는 비행기는 많았지만 대기 시간이 기본 10시간 이상이었다.
직항은 너무 비싸서 바로 제외했다. 이제 문제는 경유 대기 시간인데 애매하게 공항에서 10시간 이상 대기하느니 공항 밖으로 나가서 관광이라도 하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홍콩을 경유해서 발리로 가는 케세이퍼시픽의 항공권을 50만 원대에 구입했다.
홍콩 1박 - 발리 7박 - 홍콩 1박
총 9박 10일
항공권 자체도 저렴하게 구입한 편인데 덤으로 홍콩도 관광할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결정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의 결정은 이번 여행에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를 남기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