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에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도 나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을까? 경제관념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조차 없이, 둘 다 갓 일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맞벌이를 하긴 했지만 월급은 소소했고, 재테크나 저축 같은 단어는 생소했다. 월급은 통장을 잠시 스쳐가는 존재에 불과했다.
결혼 2년 차, 퇴사를 결심했다. 남편의 회사는 위태로웠고, 침몰하기 전에 뛰어내리는 게 나아 보였다. 내 직업 또한 미래가 없었고, 저물어 가는 산업이었다.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새로운 시작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왕이면 동시에 퇴사해 잠시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자며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퇴사했다. 친한 사람이 우리의 퇴사 결정을 듣고는 "뭘 믿고 그렇게 지르냐"며 물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젊음?"이라고 농담으로 받아쳤다. 사실 믿고 지른 게 없었다. ‘이직을 하면 되지’라는 단순한 계획만 있었다. 이때까지 돈에 대한 내 신념은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퇴직금으로 버티다가 이직준비를 하면 되겠다고 나름 계획 아닌 계획이 전부였다.
퇴사 후 두 달은 정말 즐거웠다. 신혼부부가 마냥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은 달콤했다. 퇴직금이 소소하긴 했지만 이직 전까진 충분할 거라 여겼다. 퇴사 전에 만든 마이너스 통장은 아껴 써도 모자랄 판에 대출금 일부를 갚고 14박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그것도 비싼 물가로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영국과 스위스'를 묶어서 말이다. 이 여행을 후회하진 않는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을 빠져나왔다. 말 그대로 돈 값했다.
문제는 두 달 정도 지나고, 이직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퇴직 전부터 경력이 오래 끊기면 안 되는 남편이 먼저 이직을 하기로 합의하고, 직종 변경을 생각한 나는 준비기간이 좀 더 필요했다.
너무 빨리 되면 어쩌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무색하게, 이직은 잘 되지 않았다.
백수 기간을 언제까지 하겠다는 기간 설정조차 안 한 막무가내가 문제였다.
이력서를 넣기 시작해서 알바를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기간은 길어졌다. 퇴직금은 진작 떨어졌고, 마이너스 통장 한도는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돈의 공포가 시작됐다.
돈 떨어지는 속도를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공포 그 자체였다. 자원은 끝이 보이는데, 정작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 미지수라는 건 목을 점점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모든 자원이 사라지고 나면, 나도 사라질 것 같았다
앞이 캄캄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제야 돈 무서운 줄 알고 소비를 줄였다. 감자 한 알, 양파 한 개씩 최소한의 식량만 사들였다.
돈에 대한 무서움을 체감한 건 마트에서였다. 그날따라 피스타치오는 가판대에 잔뜩 쌓여 할인행사 중이었다. 피스타치오 한 팩 7000원. 평소 피스타치오를 앉은자리에서 거의 한 팩을 다 까먹는 나는 눈길이 절로 갔다. 지금 상황에선 간식을 7천 원을 주고 사기엔 부담스러웠다. 아쉬움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쌀과자도 눈에 띄었다. 왜 그날따라 쌀과자도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 2012년 물가 기준, 5000원이면 감자나 양파 등 기본 식량 구입이 가능했다. 그날 7천 원 피스타치오와 3천 원 쌀과자는 내게 사치품이 됐다. 할인행사는 며칠간 이어졌고, 한동안 슈퍼에서 그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섰다.
만원이라는 돈의 가치는 이미 변해버렸다.
긴 백수 생활에 남편도 지쳐 갔다. 아침마다 베란다에서 "저 사람들은 갈 데가 있어서 좋겠다"며 우울해하기시작했다. 나 역시 남편을 달래며 통장을 관리하는 숨 막히는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벌처럼, 끝을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아는 분이 일을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이 경험은 돈의 중요성과 공포를 온몸으로 배우게 했다. 마이너스 통장 한도가 100만 원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받은 구원이었다.
'6개월 동안 느낀 돈의 공포는 인생에서 큰 공부가 됐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 결과론일 뿐이다. 다 지나고 돌아보니 미화되는 것이다. 아무리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임에 틀림없다. 삶의 태도가 바뀐 건 사실이다. 남편이 취직을 했어도 이미 절약 습관은 몸에 익었다.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돈을 모아야겠다고. 하지만 재테크를 할만한 여유도, 지식도 없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안 써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목표는 카드 결제예정금액 0원 만들기.
20대 때 깨달음은 '카드는 안쓰면서 갚아야 0을 만들 수 있다'였다. 신용카드를 전부 서랍 깊숙이 넣고,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이때 처음 알았다. 연말정산 때 카드보다 체크카드가 좀 더 혜택이 있다는 사실을. 체크카드는 쓸 때마다 캐시백이 들어오는 혜택을 골랐다. 푼돈 모아 푼돈이라지만, 그 푼돈부터 모아야 할 상태라고 생각했다. 돈의 공포를 만회하려는 듯 나는 돈 모으기에 집착했다.
월급은 무조건 마이너스 통장과 카드값을 갚았다. 이때 생활비는 백수생활과 비슷하게 썼다. 정말 밥만 먹고, 물만 마셨다. 소비 기준을 세웠다. 5만 원까진 체크카드나 현금으로 지불. 할부는 하지 않는다.
체크카드나 현금으로 계산하면 돈이 줄어드는 게 눈으로 보인다. 시각화는 생각보다 효과가 크다.
카드를 안 쓰니 할부가 불가능했고, 자연히 5만 원 이상되는 물건은 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쓴웃음이 난다. 당시 내 신조는 '안 보면 안 사고 싶다'였다. 쇼핑몰은 아예 가지 않거나,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다행히 남편도 불만 없이 잘 따라줬다. 1년이 안된 어느 날 신용카드 명세서를 뜯어보고 소리쳤다.
"이것 봐. 다음 달 카드값이 0원이야."
이때 경험은 재테크 관심의 시초가 됐다. 마이너스 통장 숫자가 줄어드는 걸 확인하는 재미가 있었고, 카드값 결제금액 0원은 대단한 성취감마저 들었다. 이때부턴 100원을 아끼면 100원이 쌓인다는 희망이 생겼다.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도파민이었다. 절약은 완전히 몸에 익었고, 한 푼 두 푼 저축하는 습관도 들였다. 백수생활로 얻은 긍정적 영향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엔 부작용이 있다.
문제는 점점 돈에 대한 집착이 시작됐다는 것.
지금 생각으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퇴사 전 준비기간은 필수였다.
퇴사 시기 정하기
✅한 달, 일 년, 그 이상. 대략 날짜를 정하고 디데이 체크
✅퇴사 후 어느 정도 기간을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지 체크
필요한 금액 체크
✅예상금액보다 현재 얼마나 부족한 상태인지 체크
✅얼마동안 얼마를 더 모아야 좋을지 계산하기
정보
✅ 퇴사 준비기간동안 해야 할 일 체크
✅ 건보료 금액 변동 확인 ▶️ 의료보험 임의계속이나 지역가입 둘 중 어떤 게 이득인지 체크
✅ 국민연금 일시정지, 현재 납입금액 & 연금으로 받으려면 몇 개월이 더 남았는지 체크
(금액보다 기간이 더 중요하므로)
✅ 퇴사 전 건강 검진 혹은 병원 볼일 체크
✅ 마이너스 통장 사용 여부와 이자 체크
✅ 목돈 나갈 일이 있으면 미리 사용하거나, 따로 모아두기
✅ 고정지출 줄일 수 있는 요소 확인하기
✅ 보험료 확인과 납부 연기 확인
시간관리
예상보다 길어진 백수의 삶에 속수무책이었다. 소중한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조차 없었고, 불안과 초조함에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며 무방비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 시간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막상 고정 수입 없이 늘어난 시간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야기한다.
퇴사 후 무엇을 할지 가이드라도 잡고, 구체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좋다.
대략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지만,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은 것 같다. 그때도 미리 알았더라면 섬세하진 못해도 무턱대고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 그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