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사모님 생활을 시작할 결심
요즘도 나는 마트의 계란 코너 앞에 설 때마다,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는 여러 등급의 계란 중에서 망설이지 않고 가장 비싼 계란을 집을 때마다, 거의 항상 그날을 떠올린다. 엑싯 후 처음으로 유기농 계란을 사던 그날 말이다.
사실 회사가 떠들썩하게 엑싯한 후에도 실제로 별로 달리진 건 없었다. 주변에서는 기사만 보고 엄청난 돈을 벌었으리라고들 생각했지만, 한 번에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 데다가 주식으로 받는 부분도 있었기에 실제 금액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세금으로만 몇 억을 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음에도, 통장에 찍혀있는 숫자가 커졌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게 똑같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마트에 갔던 날이다. 장 볼 목록에서 '계란'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어렸기에 늘 좋은 걸 먹이고 싶었다. 해주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도현과 함께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4년 반 동안에는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다. '이 계란을 사면, 간식 하나를 빼야 할 텐데. 두 판 말고, 한 판만 살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카트에는 중간 등급 정도의 계란을 담아야 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애써 나를 타일렀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나 보다.
이날 나는 마트에서 '나 이제는 젤 비싼 계란만 살 거야.' 결심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계란 코너로 향했다. 그곳엔 여전히 등급이 매겨진 여러 종류의 계란이 진열되어 있었다. 크게 숨을 쉬었다. 손을 들어 그간 한 번도 담지 못했던 가장 높은 등급의 유기농 계란으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비싸 보이긴 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엑싯 후 처음 해본 사치였다. 이깟 계란이 뭐라고, 이제야 남들이 성공이라고 말하던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성공은 그런 거였다.
명품 가방이나 값비싼 차가 아닌, 비싼 계란을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것.
벌써 10년이다. 이제는 잊을 만도 한데, 아마도 계란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나 보다. 여전히 계란 앞에만 서면 어김없이 그때의 기억들이 한번에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먹고 싶던 참외를 결국 사 먹지 못했던 기억.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을 때였다. 아버님이 갑자기 서울에서 병원에 다니셔야 했기에, 간병을 해야 했던 어머님까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갑자기 시작된 5인 가족 체제. 그때 둘째를 가졌다. 먹고 싶은 게 하나 없는데도 먹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먹덧이 시작되었다.
평소처럼 아파트에 있던 마트에 갔던 날 참외가 눈에 띄었다. 생전 먹고 싶지도 않던 참외가 그날따라 너무 먹고 싶었다. 군침이 돌 지경이었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참외 한 알이 계란 한 판보다 비쌌다. 한 알 정도는 어찌어찌 사 보겠는데, 시부모님과 도현과 아이도 주지 않고 나만 몰래 먹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몇 알을 한 번에 살 형편은 되지 않았다. 그 후로 참외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트에 갈 때마다 참외를 째려보기만 하고 결국 돌아서야 했다.
남들 눈에 비친 우리 집의 '형편'을 깨달았던 그날의 기억.
시부모님과 살던 그 집은 이전에 말한 언덕 위에 있던 24평짜리 아파트였다. 주방은 싱크대와 개수대를 제외하고는 밥솥을 놓을 공간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덕분에 칼질이라도 하려면 바닥에 쪼그려야 했다. 커피포트도 바닥에 놔두었다가, 사용할 때만 잠깐씩 아이 손이 닿지 않는 어느 선반 위에 올려두곤 했다. 방은 2개였고, 작은 거실이 있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그 작은 거실에 상을 펴곤 했다.
도현이 대표가 되기 전, 그러니까 우리가 한창 B2C 서비스에 매진하고 있을 당시 도현의 선배였던 대표가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을 확인하겠다고 온 건 아니었다.
아마도 아파트의 경사에서 1차 충격을 받았을 그는, 우리 집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나중에 회사에서 도현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도현 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충분히 봤고...." 이 말이 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 눈에 우리 형편이 안쓰럽게 보일 수 있다는 걸 그날 깨달았다.
형님의 한 마디가 비수가 되었던 기억.
형님네가 어렵다는 이야기에 30만 원을 들고 찾았던 날이 있다. 나에게는 거금이었다. 20만 원만 할까... 의 갈등을 이겨낸 결과가 그 돈이었다. 하지만 형님네 도착하자마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집에는 거실부터 주방, 방까지 온갖 전집들과 장난감들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30만 원이면 나도 책도 사주고 장난감도 사줄 수 있는데. 돈 없다더니 이게 무슨 상황일까. 우리가 아주버님한테 빌려준 돈도 안 갚았으면서.' 형님네 아이와 우리 집 큰아이는 나이도 같다. 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거라곤 50권 정도의 책이 전부였다. 부럽기도 했고, 배신감도 느껴졌다. 책들과 장난감을 구경하는데 아마 내 눈깔에 '부러움'이 박혔나 보다. 옆에서 형님이 쯧쯧거리며 한 마디를 했다. "아유 동서! 아끼지 말고 애 장난감 좀 사주고 해라." 하아..... 나는 그날 집에 와서 홧김에 10만 원이 넘는 블록 셋트 하나를 주문했다. 그간 사주고 싶어도 엄두도 내지 못하던 블록 셋트였다.
부모님은 미국에 오실 때마다,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어이구, 우리 딸이 저 나이 먹도록 돈 없이 생활비 보태줘야 하는 상태였으면 어쩔뻔했어. 아직도 사위가 돈도 못 벌고 그랬으면 가슴이 미어졌지. (평생을 그렇게 사신 큰 이모를 떠올리며 말씀하신다.)
맞다. 정말 그렇다.
사실 내가 계란을 집으며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바로 '감사함'이다. 예전에는 이거 하나 못 사고 그렇게 고민을 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여유롭게 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
스타트업의 성공 확률이 지지리도 낮은 만큼, 누군가는 이미 실패했을 거고 또 누군가는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거다. 누군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직원들 월급을 걱정하고, 또 누군가는 투자를 받으러 뛰어다니기도 할 거다. 그 옆에는 여전히 계란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와이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마음을 잊고 싶지 않다. 계란은 나에게 성공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는 내 마음이기도 하다.
(다음 편부터는 미국행 이야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