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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면 어쩌자는 건가

나는 억울하다

by 자몽 Feb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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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처음부터 보기)


그사이 회사는 이름을 바꿨다.
서비스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 대표도 도현이 맡았다.
그리고 나는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복직 첫날부터 나는 알았다. 이 새로운 서비스는 내가 잘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걸. B2C(Business-to-Consumer,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서비스와 결이 더 잘 맞는 나에게, B2B(Business-to-Business, 기업 간 거래) 서비스는 꽤나 어렵고도 재미없는 분야라는 걸. 망했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감조차 오지 않았다. 개발자들이 만들어놓은 페이지에는 그래프만 둥둥 떠다니는데, 뭐가 들어갈지도 대부분 정해진 상황에서 내가 더 만질 게 있나? 벤치마킹을 하려고 다른 서비스들을 보려고 해도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는 빈 화면뿐이었다. 진짜 망했다. 


울고 싶다 정말...울고 싶다 정말...


느닷없이 입원한 후에도 100일을 더 쉬었으니 회사 동료들 보기도 영 미안했다. 유일하게 말이 잘 통했던 여자 디자이너는 내 몸을 걱정해 주고(처음에 들어왔던 남자 디자이너는 이미 그만둔 후였다), 나머지 개발자들은 (원래 관심이 없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 혼자 눈치가 보였다. 

업무에서라도 도움이라도 되어야 할 텐데 초장부터 헤매는 꼴이라니. 시간이 지나고 아는 게 많아지면 좀 나아지려나. 아득했다. 


6개월간 거의 전담으로 첫째를 맡아주셨던 부모님은 내가 복직하자 이제는 어린이집도 가지 않는 갓난쟁이까지 떠안게 되었다. 

그것도 첫째와는 다르게 더럽게 잠이 없고, 입도 짧은 데다가, 극도로 예민한 등센서를 가지고 있어 종일 안고 있어야 했던 갓난쟁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이 되지 않으니 계속 울어대던 갓난쟁이. 밤에도 30분 울고, 30분 진정시키면, 30분 자고 다시 30분을 울던 그런 갓난쟁이. 난이도로 치면 최상인 그런 아이.

이 아이를 나이 많은 부모님께 맡기는 건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급한 마음에 오후에 부모님 집으로 4시간씩 와줄 이모님도 구했지만, 난이도 최상인 아이는 어른 세 명쯤은 거뜬히 지치게 만들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친정과의 분리가 시급했다. 결혼한 지 6년 차, 나도 이제는 독립이란 걸 해야 했다. 

먼저 이사를 했다. 부모님 집과는 20분 거리였다. 그리고 이모님을 우리 집으로 오시게 했다. 둘째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어린이집으로, 첫째는 여러 군데 추첨을 뚫고 스쿨버스를 태워 보낼 수 있는 한 유치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모님이 퇴근시간을 맞춰서 집에 가는 것도 내 몫이었고(도현은 더 늦게 퇴근했다), 에너지가 없는 상태로 잠들기 전까지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마음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미안하고 부족한 엄마로 남아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미 6개월을 쉰 전적이 있는데 다시 육아휴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바로 '육아기 단축근무'라는 제도였다. 


<육아기 단축근무>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를 둔 근로자가 기존의 근무 시간을 단축하여 근무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근로시간 단축제도로, 한국의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운영됩니다.

⛤ 근무 시간 : 기존보다 1일 2~5시간 단축 가능 (즉, 8시간 근무자가 4~7시간 근무 가능)
⛤ 급여 : 단축된 시간만큼 급여가 줄어들지만, 정부에서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급여’를 지원, 통상임금 80% 수준(최대 월 200만 원) 보장
⛤ 신청 방법 : 근로자가 신청하면 원칙적으로 허용해야 하며,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 불가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길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지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길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지



월급이 줄어들긴 하지만, 원래도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별 타격이 아니었다. 근무 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줄이면 야근을 할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1시경에 퇴근해 집에 올 수 있었다. 어차피 기획자의 역할이 중요한 서비스가 아니었기에 4시간 동안 집중해서 일을 처리하는 게 더 효율적으로 보였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픽업하는 것도, 유치원 버스에 아이가 내릴 때 손을 흔드는 것도 해보고 싶던 일이었다. 놀이터도 데려가고, 밥도 내가 챙겨줄 수 있었다. 일을 완전히 놓지 않으면서 그간 하지 못했던 엄마로서의 역할도 다 챙길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신청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몇 가지 서류를 내면 당연히 끝날 줄 알았다. 


근데 거부당했다! 

회사는 좋다는데, 나라가 거부했다! 


거부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 불가라고 쓰여있는데. 

인터넷을 뒤져봐도 거부당한 경우는 못 찾겠는데. 


나중에 받아본 사유는 내가 대표의 와이프이기에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이럴 수가. 내가 그간 일한 시간들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단지 남편이 대표라는 이유로. 

아마도 허위로 이름을 등록하고 정부의 보조금을 가져가는 경우가 있나 보다. 한두 명이 아니니까 이렇게 바로 거절하는 거겠지. 정직하게 살아야지 거참. 그나저나 나는 억울했다. 사모님이라고 좋은 게 정말 하나도 없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자 돌아온 답변은 내가 '진짜로' 일을 하는지 증명을 하라는 거였다. 하라면 해야지. 


먼저 고정적으로 출근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란다. 출퇴근 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472번 버스에 탑승한 기록을 모두 프린트했다. 아침에는 보통 도현과 차를 타고 갔지만, 퇴근은 대부분 따로 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일을 하고 있는 걸 보여달란다. 거의 1년 치의 이메일 목록을 캡처했다. 이 정도면 의심하는 일은 없겠지 싶을 만큼 수십 개의 페이지를 보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서류도 보냈던 걸로 기억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의 과정이 꽤나 길었고, 이렇게까지 해서도 안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던 건 기억난다. 사모님이 결코 좋은 게 아니라고 느꼈던 (열받는) 감정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후에 나는 무사히 단축근무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M&A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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