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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xit Jun 15. 2022

텍시트 비하인드 : 예술비평

예술은 유혹이다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





예술은 생산자의 특정 경험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표현하는 과정이지,

목적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생산주체는 술을 먹다가 갑자기 울고 싶은 마음, 이빨에 낀 고기의 처지가 나와 비슷해 느꼈던 무상함, 또 다른 작품을 감상하며 위대하다고 느꼈던 시간을 의지로 표현한다.


그리고 작품의 수용자들은 성적 쾌감을 얻기 위하여 이러한 예술작품을 찾아가지 않는다. 모종의 사고를 통해 합의를 이뤄야 한다면 법원에 찾아가고, 해답을 찾는다면 논문을 읽거나, 수학 문제를 풀면 된다. 그리고 성적 쾌감을 얻어야만 한다면 포르노를 찾아가라.

번지수 잘못 찾았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성공 여부는 유혹에 있으며, 유혹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유’(영) ‘표현력’(육) 생산주체의 주요 과제이다. 작품에 참여하는 이가 많을수록 유혹에 성공한 것이며,

또한 모두가 감정적 고조됨 기반했지만,  이유가 다채로울수록 예술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유혹이 쾌락을 부를 수는 있지만, 쾌락이 언제나 유혹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년)




예술과 도덕을 수술시켜 분리하고 절개한 철학자와 비평가를 반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유에 여러 결이 있으며, 복잡한 층위를 조망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이분법 칼로 예술을 갈라서 틈을 만들고, 그 사이를 자신의 지적 과시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한다. 자신을 위해 예술을 이용할 뿐이다.


헤겔을 파시즘의 행동대장으로 박제하고, 니체를 나치즘의 선구자로 걷어치우고, 루카치를 급진적 도덕주의자로 폄하하는 식의 사고처럼 이는 판단 자체를 포기했음을 반증하며,  자신이 “이분법 연쇄 살인마”임을 선전한다.


예술과 도덕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야 할 항목이 아니며,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고 봉사하는 관계도 아니다.

게오르크 루카치 (1885~1971) : 헝가리 문예 사상가

(이는 플라톤 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이러한 이분법을 초월해있으며, 관심도 없다. 예술작품은 그 무엇도 옹호하지 않는다.

“옹호”와 “~주의”는 사람이 하는 작업이지 작품은 하지 않는다. 위대한 작품은 생산주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절대적 중립성’을 확보한다.


이처럼 예술작품은 우리의 의식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행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율을 담보하고, 자율을 통해 도덕적 선택의 기반이 되는 감수성을 배양한다.


예술작품에서 도덕적 시비를 가리는 행위는 예술작품을 보면서 자위를 하는 것만큼 뜬금없는 일이며,

만약 자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포르노이다.

우리의 행동 양식과 규범을 정해주는 도덕과 도덕적 시비를 가릴 공간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법원이다.


따라서 예술에게 도덕적 역할 내지 의무가 있다면 우리 의식에 의지를 불어넣고 지성과 감수성을 꽃피우는 일이다.

이때, 예술에서 남은 도덕적 의무가 사라지고, 자율을 담보한 도덕적인 즐거움이 찾아온다.




예술은 “의지”라는 이름의 활동이다.


#texit #texit비하인드 #폭풍벤야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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