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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경 Sep 08. 2020

이소라 「7」 그리고 나 (1)

오, 다 외로워 그래요

안녕히 이제 안녕히 지금도
안녕히 그때 안녕히 아직도
안녕히 꿈들도 안녕히 눈물도
안녕히 이제 안녕히 영원히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아 영원히

—이소라, ‘Track 4’


소라 누나의 ‘Track 4’는 크게 두 부분으로 돼 있다. 사실상 두 곡을 합쳐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왜? 죽은 자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차분하게 대화하는 듯한 전반부와 달리 위에 나오는 후반부는 전형적인 장송곡 형태를 띄고 있다. 슬그머니 더해지는 드럼 세션이 이를 거의 확실히 드러낸다. 마치 망자의 관을 운구차로 실어 나르면서 조용히 읊조리는 듯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조금 더 자유롭게 해석을 뻗쳐 보자면,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대화를 거는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죽은 자가 스스로 되뇌는 독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안녕히 아직도”라는 부분, 즉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서도 작별을 고하는 부분은 죽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망자에게 완전히 이입해 내뱉는 “괜찮아 이제 괜찮아 영원히”라는 대목은 떠나가는 사람에게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된다.




이제는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정말 괜찮았다. 영원히 괜찮을 수 있으니까. 이른 아침인 6시, 집으로 돌아가는 도림천 길은 적당히 싸늘하고 적당히 청량했다. 맑은 하늘에는 한 떼의 새들이 전깃줄에 앉았다가 날아갔다가를 반복했다. 까만 새들이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내 기억에는 까맣게 남아 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해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고층 건물들이 반쯤 파스텔 톤의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일출이어야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일몰로 보였다. 아주 아름답고 짠한 광경. 완벽했다. 만물이 내 마음에 호응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아니, 죽음으로 가는 길을 응원했다. 2~3년 전의 나였다면? 죽음을 앞두고 이런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매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인간의 필멸성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일까? 아니면 궁극적으로는 삶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 퇴보한 것일까? 다행히도, 죽음이 매력적인 점은 이런 철학적 고민을 모조리 무효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당시 죽음은 내 손에 쥐여진 조커 카드와도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조커 카드가 내 손에 쥐여진 유일한 패인 것만 같았다. 째각째각 초읽기가 시작됐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계획 수준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마 이번이 세 번째였을 것이다. 첫 번째는 내가 남들과 많이 다르다는 점을 실감했을 때였다. 그 자체로서는 전혀 거리낄 일이 아니지만 나에게는 남들과 같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결국 머리까지 잠식해 버렸을 때, 너무 분해서 죽고 싶었다. 다행히 당시의 나는 너무나 바빴다. 어쨌든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지극히 단편적인 목표가 있었고 주위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냥 울분에 찬 채로 버텼다. 다행히 대학을 졸업한 이후의 나 역시 너무나 바빴다. 어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문자 그대로 시력을 잃어버릴 만큼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정도의 여유가 찾아왔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은 점점 줄어들었다. 무릇 어른이란 명분 없이 누구를 만나고 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잊고 살던 욕심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지금 많이 외롭구나, 느꼈을 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속상했다. 왜인지 그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에 나와서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다행히 이때의 나에게는 미련이 있었다. 나의 죽음을 아파할 사람들이 있었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이번 세 번째는 조금 달랐다. 울분이 솟아오르기는커녕 차분하고 편안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감정 인자가 논리 인자로 뒤바뀐 것 같았다. 일단, 나란 놈은 사랑을 과식해야만 하는 생물이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이 부조리 속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무의미했다. 계속 큰 사랑을 바라다가 끊임없이 실망하는 가운데 고통을 느끼든가 내게 주어진 사랑이 이게 전부라는 사실을 차갑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공허를 느끼든가, 계속 삶을 살아가려면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이 지리멸렬한 딜레마 자체를 완전히 끝내는 쪽이 나아 보였다. 꿈들과도 눈물과도 영원히 작별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일단 난 고통에 예민한(=겁이 많은) 사람이었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민폐를 끼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방법은 흔치 않았다. 혹시나 좋은 방법이 있을까 이리저리 검색을 해봐도 어찌나 좋은 사회인지 애초에 접근 기회 자체가 차단되는 경우가 많았다(그러니 굳이 시간낭비하지 말자). 결국 유서나 쓰면서 방법을 며칠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다행히도 나에게 주어진 ‘며칠 더’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난 밤 날 재워준 약 어딨는 거야
한 움큼 날 재워준 약 어디 둔 거야
나 몰래 숨기지 마 말했잖아
완벽한 너나 참아 오 다 외로워 그래요
너 없는 나 눈을 뜨면 다시 잠을 자 난 난

몸이라도 편하게 좀 잔다는 거야
나 몰래 숨기지 마 난 있잖아
술보단 이게 나아 오 다 외로워 그래요
너 없는 나 눈을 뜨면 다시 잠을 자 난 난

—이소라, ‘Track 7’


한 편의 왈츠 같은 형식을 띠고 있는 ‘Track 7’은 우울 및 고독과 부드럽게 춤을 추는 경지에 이른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찌나 타성에 젖었는지 잠에 취한 듯 무심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세상 그 무엇에서도 자극을 받지 못하는 화자의 상태를 잘 대변한다. 왜 잠에 기댈 수밖에 없을까? “다 외로워” 그렇다. “너 없는 나”라서 그렇다. 혹자는 그렇게 약과 잠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의 의지로 이겨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화자는 “완벽한 너나 참아”라고 일갈한다.




이미 약은 먹고 있었다. 신경안정제와 두 종류의 항우울제. 약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장기간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난 효과를 꽤나 즉각적으로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땅바닥이 꺼지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불안감과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를 만큼 울분이 차오르는 감정 기복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상태는 아니었구나. 그 이후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 그러고 살아. 다 힘든데 참고 사는 거야” 같은 말이 개소리라는 걸.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실제로 ‘더’ 힘들 수 있다. 이해까진 안 바라지만 인정은 해야 하는 부분이다. 사실 약을 먹는다고 하면 아직까지도 뭐가 불만인지 부정적인 의견을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약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갸륵한 마음에는 감사하지만, 마치 약에 의존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 방법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 이겨내야지” 툭 내뱉을 때는 나도 달리 반응할 방법이 없다. “완벽한 너나 참아” 하고 응대하는 수밖에. 나는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으니, 어딘가 고장이 나도 한참 고장이 나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 답하는 수밖에. 침대에 누웠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한기가 들면서 침대가 돌연 블랙홀로 변해버리는 경험을, 아침에 일어났는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욕실까지 움직이기가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만큼 부담되는 경험을 해봤나?


어쨌든 약은 내 불안과 감정 기복을 꽤나 많이 잡아주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 말에 따르면 우울은 투 트랙으로 진행되는 것 같더라. 우선은 감정이나 기분 상의 우울. 이건 호르몬 문제니 약의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을 터이다. 다음은 생각 면에서의 우울. 어쩌면 최근 내 감정 인자가 논리 인자로 뒤바뀐 것은 바로 이 때문일지 모른다. 감정은 싹 가라앉고 진짜 핵심 알맹이만 남은 거다. 약을 먹는다고 논리적 사실 자체가 뒤바뀌지는 않았다. (약이 아니라 신이라도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내가 처한 상황은 암담했고 일단 생각을 전개하는 한 부정적인 결론은 여실히 따라왔다. 나는 혼자다. 그러면 때로는 역효과까지 일어났다. 잠잠해졌던 감정이 다시 뭉글뭉글 피어나 나를 외로움에 사무치게 했다. 결국 “다 외로워 그래요.” 그래, 내가 도저히 떼놓을 수 없는, 그저 대처할 수밖에 없는 인생 최악의 적수는 외로움이었다. 아직까지도 외로움과의 싸움에서 내가 취하는 일반적인 대처 기제는 감정은 약으로 누르고 생각은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너 없는 나”는 특히 밤이면 달리 생각을 돌릴 곳이 없다. 결국 순식간에 지긋지긋한 결론에 이른 나는 또 고통을 받는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는 꿈이 현실보다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아예 생각을 영원히 정지시키는 것 외에 내가 달리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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