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카이 호수 성

붉은 벽돌의 성과 붉은 옷을 입은 한 인물 이야기

by 서창현
385_e038cc1163ed433c2b0b5efd226c2d6f.jpg 트라카이 호수 성(Trakai Lake Castle). 같은 도시에 위치한 '반도 성(Peninsula Castle)' 등과 구분하기 위해 '호수 성'이라고 부른다.


리투아니아의 도시 트라카이에는 호수가 참 많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인 갈베 호의 한가운데에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고깔 모양 지붕이 돋보이는 오래된 성이 있습니다. 기다란 나무다리 하나만이 유일한 출입로인 이 성은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서 마치 동화 속 풍경 같은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뽐내고 있어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부터 열기구를 타고 관람할 수도 있고, 배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둘러볼 수도 있다고 하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성의 멋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트라카이 호수 성은 중세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인들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던 시기부터 혼란과 위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맞이한 번영의 무대가 된 곳이기 때문이죠. 이번 글에서는 이 붉은 성의 주인답게도(?) 붉은 옷을 즐겨 입었던 듯한 한 인물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pic_V_Y_Vytautas_the_Great (17th century painting).jpg 비타우타스 대공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이 성에서 무려 7일 동안 계속해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쁜 일이었기에 그토록 크게 기념하였을까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리투아니아인들을 수십 년 넘게 위협했던 강적, 이웃 독일의 튜튼 기사단을 크게 무찔렀기 때문이었죠. 이토록 커다란 축제를 연 당사자이자, 이 성의 주인이기도 했던 비타우타스 대공(1350?-1430)은 지금도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훌륭한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리투아니아를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로 확장시킨 지도자였습니다. 게다가 가톨릭은 물론 리투아니아의 토속 발트신앙, 동방정교, 이슬람, 유대교까지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포용하며 리투아니아의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문화의 발전은 물론 영토 확장까지 다양한 업적을 남겼으니, 리투아니아인들에게는 마치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 아닐까 하네요.



Royal_banner_of_the_Grand_Duchy_of_Lithuania.svg.png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의 깃발


리투아니아인들은 유럽의 마지막 이교도라고 불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쪽과 북쪽에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왕국과 독일의 튜튼 기사단, 라트비아의 리보니아 기사단 등이, 동쪽으로는 현재 러시아의 조상이 되는, 루스 공국들이 있었습니다. 칭기즈 칸의 후예이자 이슬람교를 믿는 금장 칸국(킵차크 칸국이라고도 합니다) 역시 이웃하고 있었죠. 리투아니아의 첫 번째 대공이었던 민다우가스가 한때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그가 암살당한 뒤 리투아니아는 다시 가톨릭을 버리고 토속 신앙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흔히 ‘십자군’ 하면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일어난, 이른바 ‘십자군 전쟁’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자심왕’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살라딘’이라고 더 잘 알려진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흐 앗 딘 등 유명한 인물들도 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했죠. 게다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 등 각종 미디어의 소재로도 등장했기에, 십자군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굳어진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군은 무슬림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이교도’들 역시 그들의 공격 대상이었죠.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를 100년 넘게 공격하며 리투아니아를 개종시키려고 했죠. 리투아니아인들이 그들에게 저항하면서 오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비타우타스의 아버지 켕스투티스는 자신의 형제인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와 리투아니아를 공동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는 알기르다스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튜튼 기사단의 침략으로부터 리투아니아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리투아니아를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이 찾아왔죠.


Wojciech-Gerson-Kiejstut_i_Witold.jpg 요가일라에게 체포당한 비타우타스와 그의 아버지 켕스투티스.


시작은 알기르다스가 죽고 그의 아들 요가일라가 뒤를 이으면서였습니다. 리투아니아의 대공 자리를 두고, 삼촌인 켕스투티스와 조카 요가일라(1352-1434. 1362년생이라고도 함.)의 권력 투쟁이 벌어진 것이죠. 켕스투티스는 조카를 몰아내고 대공 자리를 차지했지만, 요가일라의 반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타우타스 역시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지만 목숨을 건져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지배권을 놓고 사촌과 오랜 전쟁을 벌였죠. 리투아니아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고, 트라카이 호수 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요가일라에게도, 비타우타스에게도 전부 공격을 당했다고 하니 말이죠.


몇 년 동안 내전을 벌이고도 승패를 가릴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화해했죠.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의 대공 자리를 지켰지만,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를 요가일라 대신 통치하는 ‘섭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죠.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의 일이었습니다.


튜튼 기사단은 사촌 간의 대립으로 리투아니아가 혼란스러워지자, 이것을 기회로 여겼습니다. 비타우타스는 튜튼 기사단과 동맹을 맺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하여 그들과 함께 요가일라를 공격하기도 했죠. 하지만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와 화해하자마자 튜튼 기사단의 성들을 공격해 불태웠고, 튜튼 기사단은 당연히 분노하였습니다.


Jan_Matejko,_Bitwa_pod_Grunwaldem (1).jpg 잘기리스 전투 기록화. 가운데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비타우타스이다.


오랜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1410년의 잘기리스 전투였습니다. 폴란드어로는 그룬발트 전투, 독일어로는 탄넨부르크 전투라고도 불리죠. 1592년부터 7년간 일본의 공격으로 벌어졌던 전쟁을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에서는 ‘분로쿠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지역’으로 각기 따로 부르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임진왜란이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든 전쟁이었듯,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던 잘기리스 전투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였습니다.


비타우타스는 튜튼 기사단에 맞서 리투아니아군을 지휘하였습니다. 1386년에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면서 폴란드 왕을 겸하게 된 요가일라(그는 폴란드의 왕이 되면서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도 함께였죠. 확실한 숫자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연구자들에 따르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만 6천에서 최대 3만 9천 명을, 튜튼 기사단은 1만 1천에서 최대 2만 7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튜튼 기사단은 독일 각지로부터 지원군을 모집했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등에서도 튜튼 기사단을 돕기 위한 군대가 모여들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역시 보헤미아 용병을 고용하고, 금장 칸국의 타타르 지원군을 부르는 등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먼저 행동을 취한 쪽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이었습니다. 1409년 12월, 두 나라는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였던 마리엔부르크(현재의 말보르크)를 향해 군대를 움직였고, 동시에 국경지대에 있는 튜튼 기사단의 요새들을 여러 차례 공격하면서 요새 수비군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압박했습니다. 튜튼 기사단의 본대 역시 연합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이동했고, 1410년 7월 15일 두 군대는 그룬발트 마을 근처에서 마주쳤습니다.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튜튼 기사단을 선공했습니다. 리투아니아 군대는 1시간 넘게 격전을 벌이다가 후퇴했죠. 기사단이 그들을 추격하면서 대열이 흐트러졌고, 곧이어 폴란드군과도 격돌했습니다. 폴란드 군대는 튜튼 기사단에게 왕의 깃발을 빼앗기고 브와디스와프 2세 본인도 적의 공격에 노출되며 위기를 겪었지만 무너지지 않고 견뎌냈습니다. 그때 후퇴했던 리투아니아 군대가 되돌아와 튜튼 기사단의 후방을 공격했어요. 전황이 불리해지자 튜튼 기사단장 율리히는 리투아니아 군대의 전열을 뚫고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대장을 잃은 튜튼 기사단은 결국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겨우 자신들의 땅으로 후퇴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했죠.


앞서 소개했던 것처럼,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트라카이 호수 성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거둔 승리를 기념하며 7일 동안이나 큰 파티를 열었습니다. 비타우타스는 이후 20년 동안 리투아니아를 다스렸고, 다름 아닌 이 성에서 생을 마감했죠.


트라카이의 갈베 호수에 자리 잡은 이 성은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의 부흥과 쇠퇴를 함께 했습니다. 비타우타스가 죽은 후에도 거주지로 사용되면서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새 단장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호수 한가운데에 있어서 거주지로 사용하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하였던 탓인지, 감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가 17세기에 모스크바 차르국과의 전쟁에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2세기 후에야 복구 계획이 세워졌지만,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난항을 겪다가 1946년에야 본격적인 복구가 시작되고 1961년에 마무리되었으며, 1962년 박물관이 세워진 이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하네요.


비타우타스가 사망한 날인 매년 10월 27일,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이곳에서 그가 이룬 업적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고 합니다.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오랫동안 리투아니아를 위협해온 튜튼 기사단을 크게 무찔러 평화를 가져왔으며, 그밖에도 리투아니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을 흔히 '세종대왕'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도 'Sejong the Great'라고 표기하듯이, 비타우타스를 일컬어 'Vytautas the Great'라고 적는 것 또한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1. 트라카이 호수 성(Trakai Lake Castle)

https://exploretrakaivilnius.lt/en/manors-and-parks/trakai-island-castle

2. 비타우타스의 초상화

http://www.encyclopediaofukraine.com/picturedisplay.asp?linkpath=pic%5CV%5CY%5CVytautas_the_Great%20(17th%20century%20painting).jpg

3.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깃발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Duchy_of_Lithuania#/media/File:Royal_banner_of_the_Grand_Duchy_of_Lithuania.svg

4. 요가일라에게 체포당한 비타우타스와 그의 아버지 켕스투티스. 보이치게흐 거슨(Wojciech Gerson) 作(1853)

https://en.wikipedia.org/wiki/Vytautas#/media/File:Wojciech-Gerson-Kiejstut_i_Witold.jpg

5. 잘기리스 전투(a.k.a.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 기록화. 얀 마테이코(Jan Matejko) 作(1878)

https://en.wikipedia.org/wiki/Teutonic_Order#/media/File:Jan_Matejko,_Bitwa_pod_Grunwalde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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