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정부의 기밀문건이 유출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전 세계로 정보가 일파만파 퍼질 수 있는 현재이기에, 중요한 정보가 외부로 새지 않게끔 보호하고 보안을 유지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시대의 문건 유출 사건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조선은 어쩌다가 내부 문서를 바깥에 노출시켰고, 그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또 누구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을까요?
시간은 약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36년 2월, 청의 사신 용골대 등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조선을 발칵 뒤집었죠. 자신들의 임금인 홍타이지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나라 이름을 ‘금(우리는 흔히 ’후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에서 ‘청’으로 바꾸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수많은 신하들이 반발했습니다.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에서부터, 심하게는 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의견까지 그야말로 여론이 들끓었죠.
이 소식이 조선에 큰 충격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를 배척하였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의 상소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으면 스스로 황제에 올라 자기 나라를 호령하면 됩니다. 그러면 누가 금지하지도 않을 텐데, 왜 꼭 조선에 물어보고 나서 황제에 오르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만천하에 ‘조선이 우리를 받들어 황제가 되었다’고 선전하려는 속셈입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한 마디로, 청나라의 의도가 조선에게 ‘등 떠밀려’ 황제가 되었다고 홍보하려는 것에 있지 않냐는 말이었죠. 청나라의 실제 의도야 어떠했든 간에, 조선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혼자 황제를 하든 말든 그건 조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홍익한의 표현을 요즘 식으로 풀자면, 이것은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맹약을 자기들 마음대로 바꾸어서 ‘균열’을 일으킨 것이고 조선을 비난하며 업신여기는 태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가 원래 좋았다면,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가 조선을 이토록 격앙시키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죠. 9년 전 정묘호란으로 형제국의 맹약을 맺은 두 나라였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걱거렸습니다. 후금은 조선에게 교역을 개시하고 많은 양의 곡식이나 재물 등을 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조선을 수차례 압박했습니다. 조선은 조선대로, 후금을 형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은 물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인조 역시도 공개적으로 후금을 자극하고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안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대가 후금을 공격하려는 것을 최대한 말리고, 때로는 후금 사신을 명나라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대피시키기도 했죠. 물론 ‘오랑캐’인 후금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에 불똥이 튀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명나라 군대도 조선 군대도 후금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현실 역시 잘 알고 있었던 인조는 불안하게나마 현상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라는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스스로 황제를 칭함으로써, 정묘호란 이후 불안하게 이어지던 ‘형제’ 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의 ‘청나라’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은 인조조차도 말리기 어려울 정도였죠. 벼슬아치들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청나라 사신들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청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답서도 받지 않은 채 서울을 빠져나와 청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을 달래어 붙잡아두려 했지만 그들은 들은 시늉도 하지 않았죠.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버렸으니 청나라의 보복이 있을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인조는 ‘오랑캐들이 갑작스럽게 참람된 칭호를 사용하겠다고 했고, 조선 정부가 그들의 문서를 접수하지 않자 화가 나서 돌아갔지만 서울 사람들은 그것을 통쾌하게 여긴다’며 조선 팔도의 백성들에게 적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는 글을 띄워 보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대국민 성명’을 한 셈이죠.
조선 정부는 평안도 관찰사에게도 비슷한 요지의 문건을 발송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청나라 사신을 배척하여 돌려 보냈고, 앞으로 다가올 청나라의 위험에 대비하라는 지시가 들어 있었죠. 그런데 청나라로 돌아가던 사신들이 중간에서 그 문건을 가로채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청나라와의 일전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된 셈이었죠. 그렇다면 이 사건은 조선과 청나라에 어떤 여파를 불러왔고, 그리고 몇 달 뒤 일어난 병자호란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추측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이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으로 인해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될 만큼 악화된 상황이었고, 조선 정부에서 문건 유출 자체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아 문서의 유출 자체가 병자호란 발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되네요. 청나라 역시 그 문서 자체를 빌미로 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조실록에서 문건 유출이 기록된 날은 1636년 3월 7일이고, 이후 양국의 기록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병자호란 도중인 1637년 1월 2일에 홍타이지가 조선에 항복을 요구하는 글에서야 처음으로 언급되기 때문이죠.
문건 유출 자체의 여파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 자체가 병자호란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외교 관계와, 조선에 다가오는 위기의 전조 중 하나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문건 유출 이후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갈등이 계속되었고, 결국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지속된 병자호란과 소위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조선의 항복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이미지 출처
1. 미 국방부 본청(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E%9C%ED%83%80%EA%B3%A4#/media/%ED%8C%8C%EC%9D%BC:The_Pentagon_January_2008.jpg)
2. 덕수궁 전경(문화재청 덕수궁 https://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7)
4. 장릉(문화재청 조선왕릉 https://royaltombs.cha.go.kr/new/pop_ptview/pop_tomb1501.html)
5. 삼전도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460&ccbaKdcd=13&ccbaAsno=01010000&ccbaCtcd=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