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이슬람vs힌두. 두 종교의 대결이 낳은 역사와 전설
최근 인도의 인구가 중국의 인구를 추월하면서, 인도가 중국을 제치고 전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죠. 중국 하면 최근까지도 '전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6.25 전쟁 때 중공군이 선보였다던 '인해전술' 등의 이야기(실제 중공군은 오히려 유엔군과 국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동전을 주 전술로 삼았기 때문에, 사실과는 동떨어졌다고는 합니다)도 유명하니만큼 상당한 이슈가 되었으리라고 생각되네요.
하지만 인도 역시 중국 못지않게 큰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자랑한 나라이므로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놀라울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 아대륙'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는 중국은 물론 유럽 전체와도 비견될 만큼 커다란 영토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죠. 더구나 '중화'라는 비교적 단일한 정체성을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중국사와는 다르게 인도사는 수많은 집단들이 각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채로 서로 협력하거나 대립해온 역사이기에 중국사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유명한 법가 사상가인 이사는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커질 수 있었고, 황하는 한 줄기의 물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깊어질 수 있었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었죠. 이사는 진나라가 능력 있는 인물이라면 외국인이라도 모두 등용하여야 강대해질 수 있다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이는 인도사가 왜 그토록 방대하고 깊은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도에 맞게 어레인지하자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은 외부의 모든 것도 다 받아들였기에 그토록 방대하고 깊어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요.
오늘은 인도 역사를 그토록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었던 '외부 세력들'의 유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인도사는 굳이 '외부'와 '내부'를 구분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인도 아대륙 '바깥'으로부터의 유입이 빈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외부'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당시 인도로 진출했던 이들이 인도 아대륙에 전부터 있었던 왕조나 민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정체성을 띤 집단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첫 번째로 이슬람교의 인도 진출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려고 합니다.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슬람교의 등장은 세계사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했고, 지중해 반대편 끝자락에 있는 이베리아 반도 역시 무슬림들이 장악했습니다. 유럽의 다른 기독교 세력들도 위협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흔히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비잔티움 역시 아랍인들의 도전에 직면했고,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기세등등하던 이슬람의 도전을 막아냄으로써 서유럽의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죠. 비록 유럽 진출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성한 제국 중 하나로 굳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아바스의 수도 바그다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로 불렸고, 아바스 왕조의 군대는 동아시아에서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마저 탈라스에서 물리침으로써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방팔방으로 거침없이 뻗어나가고 있던 이슬람 세력이 인도로 진출을 시도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슬림들은 현 인도의 북부~북서부에 위치한 주들인 라자스탄, 구자라트 지역으로 수없이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인도의 여러 왕조들은 프랑크 왕국이 그랬듯 무슬림들에게 맞서 싸웠죠. 두 세력의 전쟁은 이슬람교가 막 모습을 드러낸 600년대부터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인도와 이슬람 세계 모두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죠. 오랜 전쟁 끝에, 이슬람 세력은 점차 인도로 진출해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번의 전투가 현재 인도 북부의 하리아나주에 속하는 작은 도시 '타라오리'에서 벌어졌습니다.
타라오리에는 많이 훼손되어 곳곳이 무너진 옛 요새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12세기 북인도를 통치하던 여러 군주들 중 한 명이었던 프리트비라지 3세(1177-1192)가 그 요새의 주인이었죠. 그의 일생을 담은 서사시 '프리트비라지 라소'는 인도에서는 아주 유명하고 인기 있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2022년에도 『황제 프리트비라지(원제: Samrat Prithviraj)』라는 제목으로 개봉될 정도라고 하니,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나 삼국지처럼 유구한 세월 동안 인도 아대륙에서 향유해온 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그는 곧바로 수많은 도전자들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왕위를 노린 친척도 있었고, 북인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이웃나라들도 많이 있었죠. 그는 비록 인도 전체를 정복할 정도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북인도의 강자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프리트비라지 역시 무슬림들의 침공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고르 왕조가 쳐들어왔기 때문이죠. 흔히 '무함마드 고리'라고 불리던, 고르 왕조의 왕 무함마드는 프리트비라지가 아이였을 적부터 수차례 북인도를 공격해온 인물이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3세는 라지푸트의 여러 나라들과 연합군을 구성했고, 바로 앞서 소개했던 타라오리에서 무함마드의 군대를 맞아 싸웠죠. 고르 군대는 보병과 기병은 물론 전투 코끼리까지 포함된 강군이었습니다. 고르의 기병들이 화살을 퍼부으며 교전을 시작했지만 프리트비라지의 군대는 침착하게 반격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르 군대는 압도당해 패배하였습니다. 무함마드는 부상을 당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죠.
하지만 무함마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군대를 모아 쳐들어 왔고, 두 사람은 타라오리에서 다시 맞붙었습니다. 1차 전투가 끝난 이듬해인 1192년의 일이었죠. 당시 기록에 따르자면 프리트비라지는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군대와 3천 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했고 무함마드 역시 12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가 북인도의 패권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전투였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정예 기병을 이끌고 프리트비라지의 군대를 야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프리트비라지는 이에 대응하여 맞섰지만 고르의 군대가 거짓으로 후퇴하자 이에 넘어가 그들을 쫓았다가 대대적인 반격을 받아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죠. 미리 준비해둔 또 다른 기병 한 부대가 프리트비라지의 후방을 공격하면서 많은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달아났고, 첫 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프리트비라지 역시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에서는 프리트비라지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지는 감옥에 갇혔고 두 눈을 잃었습니다. 프리트비라지의 궁정시인이자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저자로도 알려진 찬드 바르다이라는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무함마드를 찾아가서 프리트비라지의 활쏘기 실력을 구경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무함마드는 그 말에 따라서, 시력을 잃은 프리트비라지에게 활과 화살을 주고 쏘아보도록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자 프리트비라지는 무함마드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활을 쏘아 그를 살해하였죠. 이후 그와 찬드 바르다이가 서로를 죽임으로써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실제 역사에서 무함마드는 전투가 끝나고 한참 뒤였던 1206년에 다른 이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이 드라마틱한 결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프리트비라지 역시 전장에서 잡힌 후 처형당했다고도 하고, 고르의 신하가 되어 풀려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다고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와는 별개로, 프리트비라지는 죽은 후 라지푸트 지역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는 시대가 지날수록 이슬람 침입자에 맞선 힌두교의 '애국적인' 전사로 기억되었으며 '최후의 힌두계 황제'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남인도에서는 힌두계 왕조들이 부흥하고 있었으므로 이 역시 실제 역사와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진출이라는, 당시 인도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되었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프리트비라지가 외세에 항거한 영웅의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 오늘날에 이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프리트비라지의 패배는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인도에 진출하는 분수령으로 여겨집니다. 고르 왕조는 북인도의 다른 강성한 군주들을 차례차례 꺾어 나갔죠. 앞서 말한 것처럼 무함마드 고리는 암살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그의 장군 중 한 명인 쿠투브 웃딘 아이바크라는 사람이 자리를 계승하였습니다. 튀르크족 노예로 장군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술탄으로 즉위하여 델리 술탄국의 시조가 되었죠.
델리의 명소로 잘 알려진 쿠투브 미나르는 쿠투브가 델리를 정복하고 인도에 진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승탑'입니다. 그가 세운 델리 술탄국은 1206년부터 1526년까지 300년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고, 한때는 인도를 거의 통일할 정도로 강성해지기도 했습니다. 프리트비라지의 이야기가 전설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유구하게 존속한 것처럼, 이슬람의 인도 아대륙 진출은 인도 역사에 '델리 술탄국의 건국'이라는 크나큰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죠.
이미지 출처
1. 인도의 국기 티랑가(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B%8F%84%EC%9D%98_%EA%B5%AD%EA%B8%B0#/media/%ED%8C%8C%EC%9D%BC:Flag_of_India.svg)
2.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는 예언자 무함마드(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D%95%A8%EB%A7%88%EB%93%9C#/media/%ED%8C%8C%EC%9D%BC:Rashid_al-Din_Tabib_-_Jami_al-Tawarikh,_f.45v_detail_-_c._1306-15.png)
3. 타라오리에 위치한 프리트비라지의 요새(https://en.wikipedia.org/wiki/Taraori#/media/File:Prithviraj_Chauhan'_Fort-2,_Taraori,_Haryana.jpeg)
4. 프리트비라지 동상(https://en.wikipedia.org/wiki/Prithviraj_Chauhan#/media/File:Prithvi_Raj_Chauhan_(Edited).jpg)
5. 1924년 영화 『Prithvirajan』 포스터(https://en.wikipedia.org/wiki/Prithivirajan#/media/File:Prithvirajan1942.jpg)
6. 쿠투브 미나르(https://en.wikipedia.org/wiki/Qutb_Minar#/media/File:Qutb_Minar_201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