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대항해시대의 운명을 건 한 판 승부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역시 최근까지 무역분쟁이 이어졌죠. 영토문제나 그밖의 여러 가지 요소로 인한 국제적 분쟁은 과거부터 계속해서 있어 왔습니다만, 무역이 각국과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면 앞으로도 무역으로 인한 갈등과 다툼은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지난 번 무슬림들의 인도 진출과 델리 술탄국의 등장에 이어서, 이번에는 인도에 진출한 외부 세력들의 무역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대항해시대'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바스쿠 다 가마나 콜럼버스와 같은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죠. 암흑시대에 빠져 있던 서구권이 세계 역사를 주도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 역시 이 대항해시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 대항해시대가 서구권에 안겨준 가장 큰 성과는 뭐니뭐니 해도 무역으로 인한 부의 축적일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이슬람 왕조들이나 비잔티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구권이 세계 무역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반대로 무슬림들은 중계 무역의 주도권을 내주었기 때문이죠.
무슬림들을 비롯한 경쟁자들이 이들의 '도전'을 당연히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대양의 커다란 파도와 악천후, 질병, 식수의 부족 등을 뚫고 세계 각지로 진출했지만, 이러한 요소들보다도 더 큰 난관을 마주해야만 했죠. 그것이 바로 다른 세력들의 저항이었습니다. 외지인들을 경계한 토착민들의 저항도 있었지만, 이 도전자들에게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길 것을 염려한 또 다른 강자들의 견제가 더 크게 다가왔죠.
잘 알려진 것처럼 대항해시대의 포문을 연 것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유럽의 서쪽 끝자락, 대서양을 마주보고 있는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이웃인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수백 년 동안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았죠. 피레네 산맥 너머의 다른 유럽 나라들 역시 무슬림들을 라이벌로 여겼고,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여러 분쟁을 치러 왔습니다. 하지만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았던 이베리아반도 사람들에게 무슬림들이 미친 영향은 더더욱 컸죠.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교와 공존해왔지만 동시에 갈등도 빚었습니다. 양자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레콩키스타'라 불리는 일련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기독교 왕국들은 무슬림들을 반도 바깥으로 몰아냈습니다.
당시 서구권은 동방과의 무역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그리고 이슬람 왕조들이 지중해와 중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비단이나 향신료, 그밖의 각종 수입품들을 전부 이탈리아와 중동을 통해 들여와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수입 부담은 커졌습니다. 베네치아는 예전부터 강성한 해양국가였고, 중동의 여러 나라들도 만만치 않은 적수들이었습니다. 특히 비잔티움까지 멸망시키며 위세를 떨친 오스만 제국이 대표적이었죠.
포르투갈은 이 경쟁자들이 장악한 지중해 대신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바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였죠.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등, 포르투갈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갔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 서쪽 해안에 교역 거점을 마련하고, 인도의 물건을 포르투갈로 직접 가져가기 시작했죠.
인도양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의 무슬림들은 바로 포르투갈을 견제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인도의 도시 캘리컷에서 포르투갈인들이 향신료를 적재한 아랍 상선을 빼앗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아랍 상인들이 수많은 군중을 이끌어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3시간 정도 벌어진 싸움 끝에 교역소 관리자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의 포르투갈인들이 캘리컷 군중들에게 살해당했고, 바다로 뛰어들어 겨우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은 포르투갈 함대로 달아났습니다. 생존자들은 포르투갈인들의 재산이 전부 캘리컷 당국에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했고, 포르투갈 함대는 캘리컷과 인근 도시들에 포격을 퍼부어 보복하면서 6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캘리컷에서의 충돌은 곧 포르투갈과 다른 세력들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이었던 마누엘 1세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를 첫 번째 인도 총독(viceroy, '부왕'으로 번역하기도 함)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죠. 이미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적 있었던 그는 22척의 전함과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로 향했습니다. 인도의 무슬림들은 멀리 이집트에 있는 맘루크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맘루크'는 본래 노예 출신으로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정예 병사들을 말하지만, 점차 세력을 길러서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인도와 유럽 사이에서 향료 중개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북인도에 위치한 구자라트 술탄국 역시 동참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나라 모두 '술탄'이 다스리는 이슬람 국가들이었죠. 오스만 제국 역시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만약 이들만이 포르투갈에게 맞섰다면 이것은 이슬람 대 기독교라는 종교 간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죠. 힌두교 세력이었던 캘리컷의 지배자들도 동참했고, 포르투갈과 같은 기독교도들인 베네치아 역시 무슬림들의 편을 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을 베네치아('베니스'는 베네치아의 영어식 표기입니다)는 지중해 무역을 주름잡는 강력한 도시국가였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인도로 진출하고 나서부터 인도산 향신료를 베네치아보다 싼 값에 유럽에 팔면서 베네치아의 이익이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관계가 나빠지게 되었죠. 베네치아인들은 무슬림들에게 배와 항해사들, 그리고 조선공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베네치아 조선공들은 지중해에서 배를 분해한 뒤 인도양에서 재조립했죠.
무슬림들은 포르투갈 함대에 먼저 공격을 가했습니다. 1508년 3월 맘루크 술탄국과 구자라트 술탄국의 연합 함대는 동맹 상선을 호송하던 포르투갈의 소규모 함대를 기습했죠.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의 아들 로렌초가 그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양측은 이틀 동안 치열하게 싸웠죠. 우세한 전력을 가진 연합 함대는 로렌초가 탄 기함을 비롯한 포르투갈 선박 6척을 침몰시키면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백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본거지인 인도 서북부의 디우로 돌아갔습니다.
프란시스쿠는 포르투갈에게 중대한 위협을 안겨주고,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앗아간 연합 함대에게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몇 달 동안 출항이 지연되었고,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새 총독을 보내 프란시스쿠와 교대하도록 했습니다. 프란시스쿠는 새 총독에게 인계를 거부하고, 그를 구속한 뒤 1508년 12월 3일 출항했습니다. 포르투갈 함대는 디우로 북상하면서 몇 차례 공격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전진했고, 얼마 뒤 목적지인 디우 항에 도착하여 적 함대들을 마주하였습니다.
포르투갈 함대의 전력은 크고 작은 선박을 합쳐 총 18척이었고, 800명의 중무장한 포르투갈 군대와 400명의 인도인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반면 연합 함대는 총 46척의 선박에 더해 수십 척의 보트들로 이루어진 대함대였죠. 병력 역시 4천~5천 명이나 되어서, 숫자로만 보면 포르투갈 군대를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이듬해 2월 2일 디우에 도착한 포르투갈 군대는 곧장 적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항만의 물결이 잔잔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군대는 적의 배가 아닌 수면을 향해 포를 쐈고, 날아간 포탄은 마치 물수제비처럼 수면에 튕긴 뒤 적선 한 척의 흘수선(선체가 물에 잠기는 한계선)에 적중하여 격침시켜버렸다고 하네요.
맘루크 술탄국의 지휘관이었던 아미르 후세인이 탄 기함에도 포르투갈 군대가 뛰어들어 백병전이 일어났습니다. 대장을 지키기 위해 다른 전함들이 지원에 나서면서 난전이 벌어졌고, 튼튼한 판금갑옷은 물론 화승총 등 당대 최신 무기로 중무장한 포르투갈 군사들도 수많은 아랍, 인도 병사들의 공격 앞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연합 함대 병사들 중에는 특히 튀르크족과 에티오피아인 출신 궁병들이 큰 활약을 벌였다고 전해지죠.
포르투갈 함대는 디우 앞바다 해협을 틀어막아 지원군이 더 나오는 것을 봉쇄하고 자신들의 장기인 화약 무기를 활용하여 수많은 적선들을 격파해 나갔습니다. 후세인의 기함도 예외는 아니었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연합 함대의 대형 카락(carrack) 1척마저 포르투갈 함대의 집중포격을 받아 격침당하면서, 디우 해전은 포르투갈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후세인은 겨우 목숨만 건져 디우를 빠져나갔고, 고작 22명의 맘루크 생존자들과 함께 카이로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포로들은 더 비참한 결말을 맞았죠.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대부분의 포로들을 잔혹하게 처형하였습니다.
승패와는 별개로, 양측 지휘관이었던 아미르 후세인과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는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프란시스쿠는 전투 직후 자신이 가두었던 후임 총독을 풀어주고 자리를 물려준 뒤 귀국길에 올랐지만, 희망봉 근처에서 토착민들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습니다. 한편 후세인은 디우 해전 몇 년 뒤 다시 포르투갈과 싸우기 위해 출정하던 중 자신의 튀르크인 부관에게 살해당했죠.
포르투갈은 디우 전투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6척의 배와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였고, 무슬림 함대에 투자했던 디우의 상인들에게서 엄청난 양의 돈을 빼앗았죠. 전투에서 빼앗은 맘루크 술탄국의 국기를 포르투갈로 보내 전시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수확은 역시 인도 무역의 주도권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빼앗아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끝의 작은 나라였던 포르투갈은 이를 바탕으로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하였죠.
하루 동안 벌어진 한 번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포르투갈과 맘루크 술탄국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인도로 그치지 않고 계속 동쪽으로 진출하였고, 세계 무역을 주름잡으면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죠. 하지만 맘루크 술탄국은 1517년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수도 카이로를 잃고, 마지막 술탄이 카이로 성문에서 처형당하면서 멸망했습니다. 한때는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든 몽골 군대마저 격파하면서 위세를 과시하였던 맘루크 술탄국이었지만 그 결말은 허무하기 그지없었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력 무기로 잘 알려져 있던 '조총'을 일본에 전해준 사람들이 포르투갈 상인들이라는 이야기는 아마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디우 해전이 인도와 중동, 유럽은 물론 그로부터 한참 떨어진 동북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물론 딱 잘라 말하기에는 다소 비약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디우 해전 직후 포르투갈이 소위 '대항해시대'의 흐름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슬림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까지 인도에 발을 들였다는 점은 끊임없이 외부 세력이 들어오는 인도사의 역동적인 모습도 잘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1. 빅토리아 호 레플리카(https://en.wikipedia.org/wiki/Victoria_(ship)#/media/File:Nao_Victoria.jpg)
2. 포르투갈 제국 국장(https://en.wikipedia.org/wiki/Portuguese_Empire#/media/File:Royal_Arms_of_Portugal.svg)
3.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https://en.wikipedia.org/wiki/Kozhikode#/media/File:Caminho_maritimo_para_a_India.png)
4.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de_Almeida#/media/File:Retrato_de_D._Francisco_de_Almeida_(ap%C3%B3s_1545)_-_Autor_desconhecido.png)
5. 창을 든 맘루크들(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Diu#/media/File:Three_Mamelukes_with_lances_on_horseback.jpg)
6. 아르카부스(https://en.wikipedia.org/wiki/Arquebus#/media/File:Double_arquebus_(26194270810).jpg)
7. 말라카 전투 기록화(https://en.wikipedia.org/wiki/Afonso_de_Albuquerque#/media/File:Conquista_de_Malaca,_estudo_-_Ernesto_Condeixa.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