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블랙아웃 (1)

[인생의 중간즘] 기억도 안 나면 갑작스럽지도 않다.

by 텍스트솔트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눈이 겨우 떠지고, 주변은 온통 '블러'처리된 화면이었다.

점점 선명해지면서 꿈에 깨는 느낌이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코에 호흡기와 소변줄을 차고, 손에는 링거를 꼽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본 적 없던 나로서는 아직도 꿈속에서 만나는 장면 같았다.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고, 먼가에 홀린 듯한 상태에서 눈만 꿈쩍꿈쩍하니,

나를 둘러싼 간호사들과 가족들이 눈 뜬 나를 알아채고 주민번호 뒷자리를 대라고 한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발음도 이상하다.

어눌한 내 말투에 적잖이 놀래면서 아내의 얼굴을 본다.

의식을 확인한 아내는 나에게 사고의 경위와 그동안의 상황을 알려 준다.

신기한 것은 당일 사고 전 몇 시간 전부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 가족들과 영국-핀란드를 여행했다.

핀란드에서 사우나를 경험한 아들은 한국에 와서 다시 사우나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이에 가족 사우나가 있는 호텔을 찾아서 우리 가족은 교육을 겸한 근교 여행을 떠났다.

교육 겸 여행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갔을 때가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후 우리 가족은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느지막이 가족 사우나로 갔다.

간단한 현장 체크 후 아내는 나와 아들에게 인사하고 숙소로 올라갔고,

이후 나는 사우나 욕탕 밖에서 미끄러지면서 머리를 다쳐

응급실로 오게 된 것이라고 아내가 설명해 주었다.

기적적으로 2일 만에 의식이 돌아온 나는 사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에 어안 벙벙했다.

당장 현실적으로 말이 안 나왔다. 대화가 불가능했다.

발음이 새고, 목에 힘이 없어 턱 밑 하관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무게가 깊어진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현재의 나의 상태를 보니

금방 나을 수 없는 상황 같아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내일 출근 못 하겠구나'


일단 깨어난 남편과 아빠, 아들을 보고서는

가족들 모두 한숨 돌렸지만 장기간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예측이 눈에 선하였다.

아내는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에 회사 주요 관계자들과 공동체 및 지인들에게

내 상황을 공유하여 내가 부재인 상황에서의 문제가 없도록 조치했다.

부재 기간에 문제가 발생하도록 조치는 했지만

언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니 심지어 제대로 걸어 다닐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른 걱정 말고, 빨리 낫는 것에 집중하라는 마음에서 발생되는 가족들의 초긍정의 대화들은

내가 의식이 없던 기간에 들었던 오만가지 생각을 이기기 위한 대사들이었을 것이다.





해야 하는 것이 많은 때에,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때에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나의 육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의 루프에 빠진 것이다.


인생의 중간 즈음에서 만난 가장 큰 고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응급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본 회퍼의 글처럼

현재의 모든 주저를 버리고 생기와 생명을 위한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에게 이 시점에서 이 고난은 왜 발생한 것이며,

'블랙아웃'으로 갑자기 찾아온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그리고 이 고난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시선골똘한 생각 속에

생사가 오가며 촌각을 다투는 응급실의 상황을 주시하며

총체적인 나의 인생을 돌아보고,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는 여정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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