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sis Polo | Knits.pourmoi
수민은 실을 받으면 스와치부터 뜬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게 일의 순서니까. 그런데 하나만 뜨는 법이 없다. 바늘 호수를 바꾸고, 무늬를 바꾸고, 두세 개를 나란히 가져온다. 처음 이 광경을 봤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게 다 필요한 건가. 지금은 그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배운 것이다.
이번엔 3.75밀리 바늘로 뜬 겉뜨기와 안뜨기 조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민이 말했다. 이 조합 그대로 가도 되겠다고.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생각이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리모나타' 무늬를 가져오기로 했다. 우리가 전에 함께 작업했던 패턴이다. 비침 무늬와 꽈배기가 함께 움직이면서 구멍의 크기를 키워가는 방식인데, 팔에 있을 때는 꽤 명쾌했다. 수민이 원하는 실루엣은 몸통 중심이었다. 무늬를 팔에서 몸통으로 옮겼다.
구멍이 너무 컸다.
리모나타의 무늬는 연속성으로 작동한다. 패턴이 끊기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핵심인데, 사이즈가 달라지고 위치가 바뀌면 그 흐름이 깨진다. 그걸 알면서도 일단 해봤다. 비침의 위치를 바꿔보기도 했고, 꽈배기와 비침의 간격을 넓혀보기도 했고, 무늬 단위 자체를 축소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결과는 조금씩 달랐지만, 방향은 비슷했다. 리모나타에서 멀어지거나, 몸통이 버거워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고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처음 무늬가 희미해지고, 그렇다고 새로운 무늬라고 부르기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그런 어정쩡한 자리에 한동안 머물렀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꼭 한 번씩 온다.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버티면 뭔가 나오고, 못 버티면 처음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버텼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새로운 무늬가 되어 있었다. 억지로 만든 게 아니라 고치다 보니 거기서 찾은 것이다. 겉뜨기와 안뜨기를 바탕에 충분히 깔고, 리모나타 무늬의 요소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처음 직감이 틀리지 않았던 건데, 그걸 확인하는 데 꽤 멀리 다녀왔다. 비싼 확인이었다.
구멍을 줄이고 꽈배기와 비침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살폈다. 완성된 무늬를 멀리서 보면 비침이 주인공처럼 보인다. 가까이 오면 겉뜨기와 안뜨기의 질감이 먼저 들어온다. 두 코 꽈배기가 중간중간 끼어들면서 보는 거리와 위치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 도안을 여러 번 그리고, 뜨고, 풀었다. 수민은 언제든지 내 마음껏 수정해도 된다고 하고 시작하지만, 얼마 못 가 이제 그만 좀 하자고 성을 낸다.
스와치가 나오고 폴로 칼라가 붙었다. 무늬의 반복 구간과 버튼밴드의 너비가 맞아떨어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무늬가 좌우대칭되면서 비침 무늬가 그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적절한 비율을 찾은 것이다. 그제서야 사이즈 계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순서가 거꾸로인 것 같지만, 뜨개에서는 이게 순서다.
실루엣은 단순하게 가기로 했다. 무늬에 이미 할 말이 많다. 거기에 구조까지 복잡하게 얹으면 둘 다 손해다. 살짝 넉넉한 레귤러핏에 골반 위에서 끊기는 기장 그리고 오픈 카라. 쓰고 보니 간단해 보이는데, 이 한 줄을 결정하는 데 우리는 꽤 오래 이야기했다. 각자 이유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유가 같으면 대화가 짧다. 이유가 다르면 대화가 길어지는 대신 결과가 단단해진다. 우리 작업이 대체로 그런 방식으로 굴러간다.
이름은 나중에 붙였다. 카시스(Cassis). 프로방스 해안의 작은 마을 이름인데, 처음엔 과일 이름인 줄 알고 대화를 헤맸던 마을이다. 어감이 좋아서 먼저 골랐고, 알고 보니 한국에서도 꽤나 유명한 휴양지였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가보지 못했다. 암석과 모래, 파도가 훑고 간 자리. 사진 속 풍경이 이 폴로와 닮아 있었다.
우리는 옷 이름이 옷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닮으면 충분하다. 가끔은 이름이 옷에게 예상치 못한 개성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럴 때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