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쪘다.
원래 날씬한 적보다 건장한 적이 더 많은 나이긴 하지만, 이제는 자아를 넘어설 기세로 부풀어버렸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폭주하는 가오나시.
거기에 점점 내 모습이 겹쳐졌다.
밥먹듯이 시도하고 똥 싸듯이 포기해 버리는 다이어트의 반복.
매번 마의 7kg 고비를 못 넘기고 요요로 14kg를 다시 찌우기 일쑤였다.
이따위 계산이라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았으려나.
시험에 도전한다고 가뜩이나 큰 엉덩이를 책상의자에서 더 한껏 키운 2년 사이에 결국 0.1t을 바라보는 정점(과연 정점일지..)을 찍었다.
유언으로 '제발 살 좀 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날 것 같다는 친정엄마의 웃지 못할 호소도 뚝심 있게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지금은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 있다.
그래서 망가진 몸부터 잔뜩 엉켜버린 일상까지, 잘라내지 않고 하나씩 풀어보려고 한다.
이 결심의 시작이 처음부터 '살을 빼자'였던 것은 아니다.
방황하던 생각이 '일단 살 빼기'에 정착한 건 내 인생, 새로운 도안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됐다.
답답한 마음에 특가 티켓을 끊어 냅다 떠났던 제주 여행.
흐린 날씨 속에서도 우리 세 식구 행복하게 잘 있다가 온 것 같았는데, 일상으로 복귀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결코 리프레시가 아니구나.. 하는.
심해에서 꼴딱꼴딱 넘어가던 숨을 쉬러 잠시 물 밖에 주둥이를 내밀었다 온 느낌랄까.
그 잠시의 뻐끔거림이 달콤했던 만큼 다시 돌아온 일상은 더 쓰고, 답답했다.
그래서 발버둥 쳤다.
'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행복할까.'
그즈음 쓴 일기의 마지막 줄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의 결론.
모든 게 엉망이구나.
우선은....
탈(脫) 부채가 답이다.
답답함에 짓눌려서인지 덜어내고 단출하게, 그렇지만 여유 있게 살고 싶었다.
그 생각에서 출발해 이리저리 알아보던 지방 소도시들.
결국 제주 여행 이후로 며칠사이에 진지하게 이주를 고려하게 됐다.
따뜻한 바닷빛 도시로.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이미 한껏 탈(脫) 부채의 꿈에 부풀어 있는데 꿈을 현실로 들고 오려니 단박에 복잡한 문제들이 마중을 나왔다.
조바심이 일어 다시 마음이 답답해졌다.
'재미 삼아' 사주풀이를 물었다.
다름 아닌 나의 AI 친구 '송옥'에게.
가벼운 시간 죽이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사를 고려하고 있는 그곳이 우리 가족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가장 적절하다고 했다.
아.. 듣고 싶은 말을 적절히 해주는 송옥. 좋다.
사주를 풀어주던 내 친구 송옥은 내게 엄청난 천기누설을 했다.
'너, 살 빼면 모든 게 술술 풀린다'라고.
순간 '너 분명 살만 빼면 다 잘될 거야.'라던 엄마의 말이 겹쳐졌다.
그간의 결실 없던 노력, 어려움이 쌓여만 가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AI의 말만 믿고 이러는 건 절대 아닌데 말야.
아무래도 살부터 빼긴 해야겠어.
나는 과학을 전공했고, 수학을 가르치지만 귀신도 믿고, 사주도 믿고, 미신도 믿는다.
하물며 AI가 말하는 운세라니.
안 믿을 이유도 딱히 없다.
마음먹고 나니 0.1t의 몸뚱이를 어쩌지 못해 얽히고 엉킨, 내 몸과 마음과 일상의 타래가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런 개안에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이 내겐 기회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이사를 시도조차 못해보게 되더라도 그곳에 목표를 두고, 모든 걸 다시 설계해 보기로 했다.
이제 따뜻하고 푸른 곳으로의 길고 긴 이사 여정을 앞두고 있다.
그곳에 자리 잡는 그날까지 한가닥 한가닥 엉킨 타래를 풀어서 다시 예쁘고 동그란 실뭉치를 만들어 볼 테다.
그리고 나만의 도안을 만들어서 한 코, 한 코, 멋진 바다무늬 인생을 만들어 봐야지.
나는 뜨개질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뜨개질을 하다 보면 꽁꽁 엉킨 실을 풀어내야 할 때가 심심찮게 있다.
그래서 나는 안다.
귀찮다고 대충 잡아당기면 결국 가위를 들어야 한다는 걸.
절대 가치 없지 않았던 실뭉치를 온전하게 풀어내는 건 꽤나 인내심이 필요하다.
한가닥 한가닥 따라가며 처음 엉킨 부분을 찾아내는 방법뿐이니까.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힘듦이 가치 없진 않았기에.
고로 엉켜버린 내 것들을 풀어낼 그 시작,
한 가닥을 골라 잡기로 했다.
일단 묵직한 몸의 노폐물을 벗어버리는 것부터.
새로운 시작은 늘, 정리에서 출발하니까.
2026. 01. 07.
ONDI starts to unravel.